[스크랩] 관광- 마틴 루터 킹 기념공원
마틴루터 킹 목사 조각상 - 조명을 받아 멋진 아웃라인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다.
20111년 10월 17일 개관한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공원> 내부의 조각상 정면 모습
조각상을 클로즈 업 해보았다.
관리와 테러 방지를 위해 가드(guard)가 지키고 있기도...
킹목사 기념비 측면 모습- 멀리 워싱턴의 상징인 연필탑이 보인다.
기념비의 후면 모습 - 앞으로 나간 킹목상 조각상 자리가 통로처럼 사용된다.
낙조가 멋지게 깔리고 있는 킹목사 기념비
하늘에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는 무렵에 조각상을 찍어보았다.
킹목사 기념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킹 목사 조각상 후면 모습 - 멀리 인공호수를 건너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공원 옆에 위치한 <킹목사 기념관> 입구
황혼이 깔리고 있는 <킹 목사 기념관>의 모습
킹목사 기념관 내부 모습 - 관련서적이나 영상물등이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다.
조각상의 측면 모습
기념비 조각자인 중국 후난성 출신의 <레이 이신>의 싸인 - 다른 생필품과 마찬가지로 Made in China ? 이다. ㅎ
황혼에 물들고 있는 킹목사 조각상 측면 모습
어둠이 깔리면서 조명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든 킹목사 조각상
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조각상
앞으로 전진해 있는 특이한 구조의 조각상
조각상의 정면 모습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는 여행객들이 관광 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명 관광지가 모두 모여있는 형국이라 관광회사들은 일단 버스로 여행객을 데려와 디씨 안에 어느
한 지점에 내려 놓으면 거의 모두 도보로 곳곳을 다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연필탑(워싱턴 모뉴멘트), 2차대전 기념공원, 한국전쟁 기념공원, 링컨 기념관,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관,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 그리고 얼마전 개장한 마틴루터 킹 목사 기념공원 등이 모두 거대한 인공호수 (Tidal Basin)
주변에 몰려 있고, 또 근방에는 공룡화석과 세계최고의 다이아 몬드 등으로 유명한 스미 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 우주
항공 박물관 등 등 몇 달을 둘러봐도 다 둘러 볼 수 없는 수 많은 박물관과 갤러리가 여행객을 반기고 있는데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한 곳에 많은 볼거리가 모여 있는 곳은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그러니 관광회사 ...참, 할만하겠다.ㅎ)
인공호수 주변에 위치한 유명한 관광지
이야기가 살짝 옆으로 샜는데...매년 1월 세째주 월요일은 미국의 공휴일이다.
지난 1월 17일 월요일, 역시 미국은 공휴일이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언제나 즐거운...ㅎ
바로 흑인 인권운동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노벨 평화상 수상자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기념일 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흑인들이 누리는 차별 없는 자유와 평등의 많은 부분이 바로 킹 목사로 부터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킹 목사는 인종차별에 대한 철폐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차별에 대한 폐단과 인권운동을 설파하며 사회와 정부,
시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악법을 폐기토록 하는데 앞장서 왔다.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침례교 전도사였고 그의 외할아버지
역시 목사였다. 그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펜실베이니아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한 후 보스턴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다.(1955 신학박사 학위를 받음)
보스턴에 거주하는 동안 킹은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앨라배마 출신의 코레타 스콧을 만나 1953년
결혼을 하고 4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킹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가(街) 침례교회의 목사를 지냈는데 이 때
앨라배마 주에서 소규모 민권옹호 단체가 공중 버스 안의 인종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이 버스 안에서 백인 승객에게 좌석을 양보할 것을 거부하자 시의 인종분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가 되었다. 이에 흑인 행동주의자들은 교통수단 이용을 보이콧하기 위한 몽고메리 개선협회를
결성하고 킹 목사를 대표로 정해 차별 철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1년이 조금 지난 후 몽고메리 시는
킹목사의 인권운동에 굴복해 공중 버스에서의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대우를 금지시켰다.
이후 몽고메리 시의 경험을 계기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은 킹은 전국적인 차별철페 운동에 앞장서게 되고 킹은
이를 위해 전국 곳곳에서 강연했으며, 국내외 인권운동 및 종교지도자들과 흑인 문제에 관해 논의하는 한편 가나와
인도를 방문하여 국가원수와 협의를 하기도 했다. 1959년 2월 킹과 그가 이끈 단체는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
환대를 받았다. 간디의 후계자인 네루와 만나면서 간디 사상의 핵심인 사티아그라하('진실에 대한 헌신')에 대해 알게
된 후, 킹은 비폭력 저항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피압박 민중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960년, 킹은 고향인 애틀랜타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에비니저 침례교회의 공동 주임목사가 되었는데…
이때 애틀랜타백화점 식당에서 백인과 따로 식사해야 하는 것에 항의하다 33명의 흑인 젊은이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기소는 기각되었으나 킹은 몇 개월 전 범한 사소한 교통위반에 관한 집행유예를 어겼다는 구실로 리즈빌 주립교도소
농장에서 복역해야 했다. 그가 무죄라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으며 이 사건이 전국적인 쟁점이 되면서 조지아 주 정부가
법적 절차를 조롱한 점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중재 실패에 대해서 비난 여론이 일어났다.
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J. F. 케네디 의 개입으로 석방되었다. 이 일은 전국 곳곳의 흑인 사회에 널리 알려져 8일 후
실시된 대선에서 케네디가 승리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60~65년 킹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행동적 비폭력 전술(연좌시위·항의행진)은 케네디와 L. B. 존슨 대통령의
행정부만이 아니라 전국의 흑인들과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백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63년 8월 28일, 킹 목사는 워싱턴 D. C.에서 역사적인 평화행진을 주도했는데 이날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링컨
기념일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평화집회를 갖고, 법 앞에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행한 유명한 연설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 버그 연설, 존 F 캐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의 3대 연설로
유명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깨어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이념을 신봉한다'는 미국의 신조안에 깃든 참 뜻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네 명의 내 자식들이, 피부 색이 아닌 그들의 품성에 의해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합시다. 이 자유의 종 소리가 모든 마을, 모든 촌락, 모든 주, 모든 도시에서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아니건, 개신교이건 카톨릭이건 간에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날을 향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전능하신 은혜로 우리 자유 얻었네"
그의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은 나중에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인권운동가들에 막혀 시련을 겪게 되는데...
결국 1968년 4월 4일 그가 묶고 있던 콘도의 발코니에서 백인 저격범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쨌거나 그가 명을 달리 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를 기리는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오늘날 흑인들이
누리는 평등과 자유의 많은 부분이 그로 부터 빚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50년 전 워싱턴 DC 에서 20만명이 넘는 군중 속에 행한 그의 명 연설 “I have a dream”이 얼마전 워싱턴 디씨 안에
세워진 기념조각상 에서 울려 나는 듯 하다. (참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