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워싱턴 관광- 하퍼스 페리 (Harpers Ferry)
하퍼스페리
미국 남북전쟁(Civil War)과 노예해방 운동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하퍼스 페리> 이다.
남북전쟁의 발발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급진적이고 과격한 노예해방론자인 존 브라운(John Brown)이라는
백인의 하퍼스페리 무기고 공격에서 시작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 브라운은 1859년, 10월 15일 저녁, 그가 믿는 신의 명령에 따라
"모든 흑인 노예에게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퍼스페리를 공격한다.
그는 하퍼스페리를 지키는 경비대원을 사살하고 무기고를 털었으나,
이틀 후,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사령관이 된
리(Robert E. Lee)장군 부대에 의해 체포된다.
존 브라운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노예제라는 범죄행위는 피를 부르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며
남북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는데...
남북전쟁 당시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하페스 페리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 국립공원이 되어있다.
마을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는 포토맥 강...왼쪽은 쉐난도어 강이다
쉐난도 강에서 바라본 하퍼스 페리의 마을 전경
운치를 더해주는 마을 입구의 오래된 목교
강가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마을 안에 위치한 지금은 폐허가 된 당시의 교회 전경
지금은 폐허가 된 마을 입구에 위치한 제지 공장
마을 뒷산에 위치한 토마스 제퍼슨 바위
- 토마스 제퍼슨이 자주 찾던- 한국의 부석사에 있는 부석(浮石)처럼 떠 있는 바위이다.
마을 전경 - 관광객들이 묵고 가는 여관 건물이다
포토맥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 각각 노선이 다른 두개의 철도이다.
지금도 기차가 빈번히 운행이 되고 있는 철도교통의 요충지 이기도 하다
하퍼스 페리 터널로 통하는 철교
- 관광객들이 마을에서 내려 이 철교를 건너 관광에 나서곤 한다.
철교의 옆 모습
마을 전경-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이나 먹을거리 옷가지 등을 파는 상점들의 모습이다
자그마한 시골 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하퍼스 페리 역사(驛舍) 모습
- 멀리 절벽을 깎아 만든 아치형의 굴이 보인다.
하퍼스페리 역사(驛舍)의 플랫폼 모습- 아담한 대기실이며 역사가 정겹기만 하다.
옹기 종기 붙어 있는 오래된 주택가 전경
하퍼스페리의 상징이 된 - 마을 성당 모습
마을의 거리 모습 -은행이며 관공서, 상점, 박물관등이 위치해 있다
간단한 다과와 식사,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가게
- 주말에는 한참 줄을 서야 사 먹을 수 있다.(장사가 엄청 잘 된다^^*)
쉐난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안개에 잠긴 마을전경
하퍼스 페리의 야경
가을이 멋지게 물들어 있는 하퍼스 페리 마을 전경
-왼쪽이 쉐난도어 강, 오른쪽이 포토맥 강이다.
하퍼스페리는 한 마디로 한국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나 두물머리 같은 곳이기도 하며.
또한 지리산에 있는 세개의 도가 만나는 삼도봉 같은 곳이기도 하다.
비행기 사고로 작고한 죤 덴버의 명곡 Country Road에 나오는 쉐난도어 강과 포토맥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버지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메릴랜드 3개 주가 만나는 블루리지(Blue Ridge)
산맥에 위치해 있다.
미국 남북전쟁의 전조를 알리는 주요사건 중의 하나인 하퍼스페리 습격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
했으며, 남북전쟁 때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 이기도 하다.
1734년 로버트 하퍼가 이곳에 정착하여 포토맥 강을 가로지르는 나룻배를 운영했으며, 쉐난도어
강가에 제분소를 세웠다. 이 곳의 풍부한 수자원을 높이 평가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이 곳을
무기고로 지명하고, 1796년 하퍼의 자손들로부터 이 곳을 매입했다.
이후 이 곳은 미국의 주요 무기공장과 소형권총 생산지로 발달했다.
1859년 10월 16~18일 하퍼스페리 무기고(뒤에 버지니아 주로 옮겨갔음)는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John Brown(존 브라운)이 이끄는 무장습격대의 공격을 받는다.
이 사건은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의 산간지역에 해방노예들의 독립적인 본거지를 건설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첫 단계로서, 보스턴의 여러 저명 인사들로부터 도덕적 명분을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아 계획된 일이었는데, 하퍼스페리가 선정된 이유는 이 곳에 무기고가 있고 또 남부로
쉽게 통하는 관문에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John Brown
존 브라운과 그가 이끄는 16명의 백인과 5명의 흑인들로 이루어진 공격대는 10월 6일 밤, 이 곳
무기고를 습격하고 접수했다. 전국이 이 사건 때문에 동요하게 되었고, 주·연방 합동군이 2일 만에
이 곳에 진입해 이들을 진압 했다. 이 과정에서 17명이 죽고 생포된 브라운과 6명의 공격대원들은
하퍼스페리에서 곧 처형이 되었다.
북부인들 대부분도 이 습격사건을 비난했지만, 이미 노예반란을 두려워하고 있던 남부인들은 이
사건 때문에 더욱 격앙이 되어 "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남부인들의 '오랜 고유 관례'인 노예제를
뿌리째 뽑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고 맹비난하며 술렁거렸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 곳은 워싱턴 D. C.의 방어를 좌우하는 주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으며,
남군과 북군으로 부터 번갈아 여러 차례의 공격을 받았다. 1862년 9월 13~15일에 '철벽' 토머스
J.잭슨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이 곳을 장악하며 1만 2,500명 이상의 포로를 생포했는데 이는 남북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북군측 패배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이 곳은 조용한 주거지가 되어 있으며, 1944년 국립기념지역으로 지정이 되었고, 1963년
국립역사공원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여러 박물관, 기념관, 역사적 건물, 전쟁유적지 등이 있다.
워싱턴 DC 에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이 곳에는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남북
전쟁 당시를 회고하기도 하고 또한 이 곳의 멋진 풍광에 취해 강가의 소로를 호젓하게 걸으며
모처럼의 서정과 낭만을 즐기고 가는 한번 쯤 들려보는 관광코스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