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 실패 사례
의사결정 실패 사례
경영자들 중에서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내릴 때 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영자들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순간마다 가장 타당한 결정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결과는 골프처럼 항상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볼이 날아가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원하는 방향으로 볼을 보내기 위해서는 결국 다양한 필드에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다. 타당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경영자들 역시 다양한 의사결정의 실패 사례를 통해 보다 적절한 의사결정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개발에만 과도한 투자(봄바르디어)
봄바르디어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얼에 본사를 두고 중공업을 주된 업무로 하는 대기업이다. 철도 차량과 항공기, 스노우모빌 등의 차량 생산에서 운행 제어 시스템 등의 보안시설까지 폭넓게 생산하고 있으며 철도 부문에서는 세계 최대의 생산제조 부문에서 세계 3위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 시작은 1936년 조제프 아르망 봄바르디어가 작은 정비소에서 스노우 모빌을 제조, 판매한 것으로부터다. 창업자인 조제프는 퀘벡의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계를 만지는 일에 열중했고 19세의 젊은 나이에 공향에서 기계 수리공장을 열었다.
남다른 손재주를 가진 조제프는 자동차와 농기구, 펌프 등 각종 기계 수리를 직접 했고 3년 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빌린 공장의 개설 자금을 전부 상환하고 가정도 꾸릴 정도로 공장의 토대를 만들었다.
창업자 유언과 달리 본격적으로 사업 확대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캐나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철만 되면 많은 눈 때문에 교통이 두절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제프는 공장이 기반을 잡자 바로 이러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스스로의 기술을 활용하고자 자동차의 앞부분에 썰매를 다는 형태로 제설 기능을 가진 차량의 제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차량 제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차량 제작은 난항을 겪었고 조제프는 사랑하는 아이가 아플 때 쌓인 눈 때문에 병원에 데려가지 못해 아이를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1935년에 이르러서야 고무 크롤러를 타이어에 장착해 스프로킷으로 구동하는 시스템을 완성하면서 첫 스노우 모빌 제작에 성공했다. 조제프가 만든 스노우 모빌은 완성되자마자 주문이 급증했고 그 중에는 악천후 때문에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의시들의 주문이 특히 많았다.
이렇게 수요가 늘어나자 소규모 공장으로는 더 이상 주문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조제프는 1940년에 연간 2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공장을 확대했다. 또한 당시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캐나다가 영국 연방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 군 당국에 협력해 군사용 스노우 모빌을 개발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다시 원래의 제품 생산으로 돌아가 눈이 많이 오는 악천후 속에도 환자를 응급 이송하거나 눈이 쌓인 날에도 우편 배달이 가능한 차량, 아이들을 학교로 보낼 수 있는 스쿨버스를 생산해 실적을 올렸다.
그렇게 판매 수익이 증가함에 따라 조제프는 봄바르디어의 생산 품목을 확대했다. 악천후에 운행 가능한 스오우모빌 기술을 응용해 진흙탕에서도 달릴 수 있는 농업용 트랙터를 개발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직원에게 스노우모빌이나 유틸리티 차량 이외로 사업을 확대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대를 이은 봄바르디어의 경영진은 몬트리올과 토론토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며 조제프의 유언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상장 이후 확보된 자금을 바탕으로 철도 차량 제작 사업과 항공기 제작 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다 2003년에 들어서는 창업 당시의 주력 제품이었던 스노우모빌 등 다목적 주력 제품이었던 스노우 모빌 등 다목적 차량 제조 부문의 사업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해 항공 우주 부문과 철도 차량 부문에 사업을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술 개발에 대한 성공 체험이 오히려 독
그런데 봄바르디어는 2007년부터 경영 상황이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봄바르디어 항공기가 동체 착륙을 한 것을 계기로 봄바르디어의 기술력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해 주문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자사 항공기가 동체 착륙한 것만으로 봄바르디어 생산 부문의 주문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이외에도 캐나다에서 개발 중이던 비행기의 엔진이 문제를 일으키며 테스트 비행이 중단되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항상 신기술을 선보이던 에어쇼에서조차도 기술적인 문제로 참가를 취소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기술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는 등 봄바르디어의 기술 개발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반적인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문제는 봄바르디어의 경영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술 개발에만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술 개발에만 투자하는 의사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는 기술 개발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투자 비중을 줄이면서 다른 분야와의 연계를 모색하는데 봄바르디어는 오직 기술 개발에만 계속해서 투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봄바르디어의 경영진은 재정 부담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기술 개발에만 열중한 것일까. 그것은 창업 이래 봄바르디어의 성공을 이끈 기술 개발에 대한 성공 체험이 지속적인 투자만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고 보인다. 봄바르디어는 창업자인 조제프가 악천후 속에 이동 가능한 스노우모빌 차량 제조를 시작했을 때부터 기술 개발을 무엇보다 중요시해 왔고 실제로 지금까지 모든 부분에서 항상 기술 개발을 선도하는 기업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술 개발을 등한시해서는 안 되고 신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한다는 사풍이 형성되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기술 개발에 대한 성고 체험이 오히려 의사결정 과정에서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흔히들 성공 체0험은 기업 구성원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부여하고 동시에 업무엘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 체험은 스스로가 과거에 이루어 낸 업적에 대한 너무나 강한 믿음을 주다 보니 그 믿음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어떤 의사결정을 할 경우 그것이 성공 체험에 대한 맹신을 바탕으로 내린 것은 아닌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결정을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업문화에 반하는 의사결정(제록스)
제록스는 인쇄기기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로 포춘 500대에 들어간 명문 기업이다. 과거 제록스가 프린터, 복합기, 복사기, 디지털 인쇄기 및 관련 서비스 시장을 독점하고 있을 당시 미국에서는‘복사하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제록스하다 라는 동의어가 검색될 정도로 복사기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런 제록스가 2000년대 초반 파산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다. 원인은 의사 결정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아래에서는 제록스가 의사결정에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파산 위기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오피스 혁명으로 신기록 갱신했으나...
제록스는 1906년 로체스터에서 창업해 인화지와 관련 기기를 제조하는 것을 주 사업으로 진행해 왔다. 그러나 1959년부터 체스터 칼슨이 전자 사진 기술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일반 용지 복사기 제록스 914를 출시하면서 복사기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기업으로 부상했다. 제록스 914가 인기를 얻자 이 모델로부터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제록스는 1960년 이후 급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진행해 1963년 최초로 데스크톱 일반용지 복사기 제록스 813을 시장에 내놓았고 이 모델은 오피스 혁명을 가져왔다. 체스터 칼슨이 꿈꾸어 온 사무실 책상 위에 둘 복사기가 완성되면서 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두 복사기를 공중 전화망에 연결해 한쪽 복사기에서 스켄한 문서를 원격지에 있는 다른 복사기로 출력하는 실험, 즉 팩시밀리의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레이저프린터의 개발에도 연이어 성공하면서 제록스는 매출과 수익 면에서 매년 신기록을 갱신해 나갔다.
1973년 제록스는 다른 기업들에 한발 앞서 개인용 컴퓨터와 비슷한 미니컴퓨터인 제록스 알토를 개발했다. 그런데 이번 에는 신제품 개발이 오히려 제록스의 성장일로를 바꾸는 부정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제록스는 놓치고 애플은 발견한 가치
제록스 알토는 컴퓨터 화면과 마우스 모양의 조작 장치, 쿼티 자판을 갖추고 있는 최초의 PC 현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제록스의 경영진은 안타깝게도 알토를 상업화하지 못했으며 제록스 내부에서도 이 제품의 잠재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제록스에 들렀다. 그는 이 기술의 상업적인 잠재성을 파악했고 최초의 상업용 PC 리시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스스로 기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 제록스는 이후 라이벌 기업들로 부터 독점금지법 위반 소송에까지 휩싸였다. 결국 특허 중 상당수를 경쟁 기업인 일본 기업들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내주고 말았고 수익이 100%에서 14%로 하락하는 부진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창업자인 제록스의 당시 경영진이 실적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가족주의적 경영과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위기를 이겨 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실적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제록스는 경영진과 직원들이 힘을 합쳐 노력한 결과 레이저프린터에 스캐너를 장착하고 동시에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 가능한 디지털 복사기를 개발했다. 경쟁사 보다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또 다시 부흥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가족주의. 고객 우선주의 버린 판단 착오
하지만 이렇게 수익이 늘어나는 것도 잠시, 제록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 간 경쟁의 격화로 인해 경영 환경이 악화되어 전반적으로 수익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2000년의 전체 매출은 1999년 대비 5% 감소한 186억 3200만 달러, 특별비용을 제외한 순이익은 92% 감소한 1억 1700만 달러였으며 구조조정 비용 등 특별비용을 포함하면 3억 84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왜 제록스는 또 다시 부진에 빠지게 된 것일까.
당시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은 사원에게 경영자의 지휘명령을 충실히 따르도록 요구하곤 했다. 경영진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원은 해고를 하거나 더 경영 상황이 악화되면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하지만 제록스는 사원을 비즈니스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사원한 사람 한 사람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경영 철학을 지켜 왔다. 매출이 줄어들어 경영 상황이 악화될 때에도 경영진은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사원들과 같이 고통을 분담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한 조직문화는 제록스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1998년 제록스의 매출이 급감하던 시점에는 이러한 제록스 내부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창업자 가족이 경영 일선에서 밀려나고 릭 토만이 신임 CEO로 부임한 것이다. 토만은 제록스의 가족주의적인 경영 방식이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다고 판단해 주주 이익의 최대화를 추진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성과주의를 도입했으며 비용절감을 통한 재무 구조의 건전화로 단기간에 주가 상승을 도모했다.
그런데 토만의 이러한 의사결정은 오랫동안 제록스의 중요한 철학이었던 고객 우선주의를 실행하는 데 문제를 가져왔다. 비용 절감 명목으로 고객 서비스를 담당하던 직원들이 대거 해고되면서 서비스가 부실해진 것이다. 당연히 고객들로부터 불만이 쏟아졌다. 제록스의 매출은 줄어들었고 결국 토만을 리더로 한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이를 감추기 위해 판매 매출 64억 달러를 부풀려 계상하는 회계조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기업문화 개혁 의사결정은 신속보다 신중
물론 새로 부임한 경영자에게 있어서 기존의 틀을 탈피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한 의사결정은 인사, 영업 재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추진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오랜 문화적 정체성을 바꾸려는 의사결정은 단기간에 단행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의사결정의 중요한 요인으로서 신속성이 강조되지만 그 무조건 빨리 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성이란 경영 전략의 차원에서 충분한 사전 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기업문화를 통째로 바꾸려는 개혁을 단행하는 의사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질 사안이 아니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기업문화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내려야 하는 의사결정 사안인 것이다.
토만은 바로 이러한 의사결정의 요인중에서 가장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할 기업문화의 변화를 단시간에 결정함으로써 그것도 기업 구성원들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진함으로써 결국 회계 조작까지 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새로운 전기 자져온 마텔의 과감한 의사결정
1945년 설립된 장난감 제조회사인 마텔은 1955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ABC TV가 신규 프로그램인 미키마우스 클럽을 계획하면서 마텔에 52주간의 광고 독점권을 제안한 것이다. 그 금액은 50만 달러였다. 마텔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50만 달러는 거의 마텔의 기업 가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마텔의 창업자인 엘리엇과 루스 핸들러 부부는 재무 책임자에게 만약 이 계획이 실패하면 우리는 파산하게 됩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파산은 하지 않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였다. 하지만 당시 소형 기관단총 형태의 새로운 장난감 출시를 준비하고 있었던 마텔은 결국 과감하게 투자해 TV광고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장난감 광고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중해 카탈로그 위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난감 회사들은 크리스마스 6주 전부터 크리스마스까지의 기간 동안 연간 매출의 80%가량을 달성했고 이 시기 아이들 선물을 사야 하는 부모들이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
마텔은 연간 상시적으로 매출을 올리려면 부모뿐 아니라 아이들을 고객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TV광고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정기적이고 반복적인 광고를 통해 장난감에 친숙해져야 아이들이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은 대성공이었고 마텔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마텔의 매출은 3년 만에 3배나 올랐다. 이러한 성공은 1959년 대히트를 기록한 바비 인형의 탄생에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마텔의 이 의사결정은 2005년 포춘이 현대 비즈니스에 큰 영향을 미친 20가지 의사결정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가족 기업에서 배우는 의사결정 방법
가족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신속성이다. 창업자 가족은 창업자의 카리스마를 계승하고 있고 2~3대에 걸치면서 창업자의 경영 철학 아래에 사원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 즉 구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구심력 덕분에 창업자 일족의 의사결정에 사원들이 잘 따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영자의 의사결정은 빨라지고 그 결정이 회사 내에 바로 침투될 수 있다. 또한 가족 기업의 후계자는 전문 경영인과 달리 오랫동안 최고 경영자로서 회사의 경영에 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회사 운영의 방향을 의사 결정할 수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주류, 음료 회사인 산토리 홀딩스의 사례를 보자 산토리는 4대에 걸쳐 창업자 일족이 경영자의 지위를 유지해 왔고 맥주 사업 이외에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산토리의 경영자들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언젠가 맥주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가족 기업이 아니라면 이런 목표는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실현가능성이 없으면 묵살되기 쉽다. 하지만 산토리는 가족 기업이다 보니 맥주 부문의 부진을 언젠가 씻고 말겠다는 경영자의 결정을 지지해 무려 46년 동안 노력을 거듭했다. 그 결과 맥주 부문에서 마침내 1위를 기록했고 기세를 몰아 프리미엄 맥주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회사의 전략적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실현하도록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족 기업의 특징이다. 즉 가족 기업의 경우 스스로가 믿는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경영의 요소일 것이다.
위기의 크라이슬러를 구한 경영자의 의사결정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의사결정권자는 당연히 경영자이다. 크라이슬러가 두 차례의 파산 직전 위기에서 리 아이아코카 회장과 로버트 이튼 회장의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의사결정에 힘입어 기사회생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77년대 말 미국의 3대 자동차 메이커인 크라이슬러는 적자로 허덕이며 도산 위기에 처했다. 당시 아이아코카 회장은 탁월한 카리스마적인 경영관리 능력과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이러한 상황을 반전한 인물이다. 하지만 1900년대 들어 또 다신 5억 달러의 적자와 일부 공장에서 임금 지불마저 어려워지는 등 회사의 존립을 흔드는 상황으로 악화 됐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영웅은 아이아코카의 후임으로 취임한 로버트 이튼이었다.
아이아코카가 디자인에서 부품 성능까지 모두 직접 의사결정을 한 카리스마를 내세운데 반해 이튼은 모든 의사결정 권한을 팀 리더에게 위임하는 자율과 참여를 강조했다. 이러한 의사결정 덕분에 신차를 개발하는 기간을 평균 4년 반에 2년까지 줄일 수 있었고 개발 원가도 경쟁사 절반 수준으로 절감됐다.
생산 노하우를 협력업체에 전수하고 자사 지원에 비해 인건비가 적은 협력업체 직원을 생산 과정에 대폭 투입한 것도 당시 미국에서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이러한 의사결정은 크라이슬러를 또 한 번 위기에서 구출해 내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시류를 놓친 안일한 자기 신뢰(폴라로이드)
폴라로이드는 1937년에 에드윈 하버드 랜드가 설립한 회사이자 동시에 회사가 개발한 즉석카메라를 가리킨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 필름 카메라가 전성기를 누릴 때 찍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인화되어 나오는 즉석카메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기존의 필름 카메라와는 차별화된 특징을 가졌던 폴라로이드가 두 번의 파산 이후 세 번째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한 때 인기를 누렸던 폴라로이드가 어떤 이유로 두 번의 파산에 이르렀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세계적 흐름인 디지털화에 회의적
폴라로이드의 창업자인 랜드는 3살짜리 딸로부터 왜 촬영한 사진은 그 자리에서 볼 수 없어 라는 질문을 듣고 사진 이미지 형성 방법의 단축 처리에 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랜드는 확산 전사법에 의한 이미지 형성 연구개발 및 분석 그리고 광학 기기의 개발을 시작한 후에 1947년 미국 광학협회에서 인스턴트 확산 전사법 이미지 형성 방법 및 촬영 장비를 공개했고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랜드는 즉석카메라를 개발했는데 바로 이것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된 것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당시 주류 제품이었던 필름 카메라와 차별화된 전략으로 인기를 얻어 성장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즉석에서 찍은 사진을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때 폴라로이드의 경영진도 업계에 디지털화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들도 많은 디지털 제품을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폴라로이드의 경영진은 디지털화의 흐름에 발맞춘 제품들이 연구부문에서 개발되어 검토를 요구받자 그때마다 이런 디지털화된 제품을 내놓으면 필름 카메라의 매출이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존 폴라로이드의 시장 입지가 낮아질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당시 경영진들의 회의를 지켜 본 관계자는 폴라로이드의 경영진들 중에는 만약 디지털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타사에 추월당해 회사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폴라로이드는 디지털화에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필름 카메라 시장을 우지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폴라로이드 경영진은 왜 이런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디지털카메라의 경우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즉석에서 인화하는 대신 데이터화해 나중에 출력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무거운 프린터를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진관에서 인화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점에서 안심한 것이다.
즉 디지털카메라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달리 그 자리에서 인화할 수 없으므로 컴퓨터에 데이터를 보존하고 다시 프린터로 연결하는 것을 번거로워하는 소비자들에게는 폴라로이드가 계속 지지를 받을 것을 판단했다.
그러나 상황은 폴라로이드 경영진의 예상과 달랐다. 디지털카메라 분야에 소니와 엡손 같은 전자회사가 참여하면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인화하는 즉석 프린터가 출시되었다. 디지털카메라에 비해 인화가 쉽다는 장점을 가진 폴라로이드의 입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 것이다.
혁신 여건 충분했으나 잘못된 전략 수립
그렇다면 이처럼 라이벌 기업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공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폴라로이드는 왜 기술 개발에 보다 더 힘을 기울이지 않은 것일까. 물론 폴라로이드가 처음부터 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창업자인 랜드가 경영자로 있을 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 중에는 타사의 대형 카메라를 훨씬 웃도는 20X24인치(약 50X 60cm)크기의 초대형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기종도 있었고 해상도가 뛰어난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즉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랜드가 떠나고 뒤를 이어 경영을 맡은 경영진들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해상도와 촬영 규모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기술력을 향상하기보다는 저렴하고 간편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 결과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바로 인화된 사진을 보는 이점은 있지만 렌즈의 질이 낮고 화질도 좋지 않다는 이미지가 고착화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화질이 좋은 디지털카메라가 세상에 나오자 폴라로이드는 소비자로부터 서서히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결국 폴라로이드는 수익이 줄고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사모펀드에 매각되는 등 파산과 회생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늦게나마 폴라로이드가 기존 제품의 특성을 살린 디지털카메라 형태의 카메라를 내놓아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SNS 앱의 하나인 인스타그램이 폴라로이드의 특징을 살린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폴라로이드의 새로운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는 것도 희망적인 부분이다.
여기서 폴라로이드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다시 주목해보자. 랜드에 이어 경영을 맡은 폴라로이드의 경영진들은 왜 고성능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 개발보다 저념한 가격대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시류 파악 못한 채 의사결정 원칙 무한 신뢰
폴라로이드의 창업자인 랜드는 1976년에 코닥이 즉석 카메라의 특허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당시 제품의 질적인 면에서 코닥이 폴라로이드를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랜드는 코닥이 폴라로이드의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소송을 제기해 14년 동안의 법정 공방 끝에 승소했다.
그리고 폴라로이드는 이 특허 소송에서 9억 25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차지했다. 바로 이 경험이 폴라로이드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 즉 폴라로이드는 거대한 자금을 항상 기술 개발에 투자하면서 동시에 저 가격대의 제품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기업들이 즉석카메라 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라이벌 배제 전략을 추진한 것이다. 물론 폴라로이드의 이러한 의사결정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라이벌과 경쟁을 하는 것보다 라이벌이 경쟁 그 자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성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폴라로이드의 경영진들이 디지털카메라라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주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즉석카메라라는 오래된 시장에서 경쟁자가 없다고 호기를 부린 것에 있다. 당대의 시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의사결정 원칙이 타당하다는 무조건적인 신뢰에 빠지고 만 것이다.
오래된 기업일수록 경영자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사 결정의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 이 원칙이 일반적으로는 경영자들의 의사결정 지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폴라로이드의 경우는 오히려 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랜 역사를 가진 기업일수록 의사결정의 원칙이 시류에 맞는지 제삼자적인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의 함정을 조심하라.
1, 성공 체험 근거로 의사 결정하는 유혹에서 벗어나라.
경영자와 기업 구성원들은 스스로가 이룬 성공 체험을 근거로 모든 의사결정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가령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 회의에서 나름대로 야심찬 계획을 제안했다고 하자. 이때 회사에 오래 근무해 성공 체험을 가진 직원이 우리는 이렇게 해서 성공했고 지금 그 방식은 우리와 맞지 않다고 단정 지어 버리면 모처럼 제안된 새로운 안이 충분히 논의되기 힘들어진다. 때문에 성공을 경험한 경우라 해도 새로운 제안을 신중히 검토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2, 기업문화에 맞는 의사결정을 하라.
기업의 구성원들은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신속함도 중요하지만 의사결정의 전제로서 기업문화에 맞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경영자의 의사결정은 기업의 구성원들과 소비자들이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남감 회사인 레고가 한때 경영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당시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 기업문화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난감 회사인 레고가 한때 경영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당시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 기업문화에 반하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었다. 창업자 일족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새로 부임한 레고의 경영자는 레고 본래의 블록 장난감 연구개발은 등한 시하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와 합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레고 본연의 캐릭터보다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해 쉽게 주목을 끌고 수익을 창출하려는 전략은 레고를 오랫동안 사랑했던 마니아 고객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3, 능동적 변화에 대처하려는 의사결정을 하라.
새로운 제품의 출시로 시장이 완전히 변화하는 가운데 경영자는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까. 스스로의 비즈니스 모델을 지키려는 보신주의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려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기존의 시장을 유지하면서 예전부터 해 왔던 대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다면 경영진으로서 업무적인 부담이 적을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하다가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져야 할 위험 부담도 없다. 그래서인지 안정적인 노선을 지향하는 경영진들은 시장자체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변화에 맞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보신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럴 경우 기업의 발전은 쇠퇴하고 오히려 서서히 경영부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의 변화가 감지된다면 경영자는 기존 제품의 시장 틀을 유지하거나 지키려하기보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도전에 뛰어드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의 변화에 도전할 수 있는 경영자 스스로의 원칙을 마련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투자가 워런 버핏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고 말했다. 모든 의사결정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언제든지 극복해 내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마냥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의 성공 체험, 보신이라는 틀 안에서 몸을 숨기지 말고 기업문화의 기치를 지키는 범주 내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