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
과학과 경영
야구의 계절이다. 지난 시즌부터 시작된 10구단 체제가 올해는 더욱 안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국내 첫 돔 구장인 고척돔과 대구의 새 구장 삼성라이온즈 파크가 개장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볼거리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사상 최초의 800만 관중돌파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프로야구는 기록의 경기이다. 기본적인 통계를 알고 경기를 보면 재미가 더 해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프로야구 원년 이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1941년 이후 4할 타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프로야구는 공 하나, 타격 하나,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가 모두 기록으로 남고 수치화된다. 그 중 타자의 능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수가 타율이다. 한 시즌 동안 가장 타율이 높은 타자에게는 타격왕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진다.
지난 해 타격왕은 NC 다이노스의 외국인 타자 테임즈였다. 그는 2004년 현대 유니콘스의 브룸바에 이은 두 번째 외국인 타격왕이다. 테임즈의 타율은 3할 8푼 1리, 즉 그는 10번 타격에 나서면 3.8번은 안타를 쳤다. 이는 2000년대 최고의 타율로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성적이다.
역대 2위의 타율은 1994년 이종범의 3할 9푼 3리였고 최고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타격왕 백인천의 기록이다.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시즌을 뛴 백인천의 타율은 무려 4할 1푼 2리, 한국 프로야구 34년 역사에서 유일한 4할 타율 기록이다.
14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4할이 넘는 타격왕이 총 28번 있었다. 1920년대에는 4할 타자가 아주 드물지도 않았다고 한다.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는 1941년의 테드 윌리엄스였다. 그의 타율은 4할 6리였다. 그렇다면 4할 타자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언뜻 생각해보면 그만큼 투수나 야수들의 수비 능력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야수들이 공격을 할 때는 타자로 나선다. 야수들이 공격을 할 때는 타자로 나선다. 야수들이 수비 능력만 커지고 타격 능력은 제자리걸음을 했단 말인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타자들의 타격 능력은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좋아졌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 량 증가로 타구의 비거리가 늘어났고 변화구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배트를 다루는 기교 또한 향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투수들의 능력이 향상된 만큼 타자들의 선구안도 좋아졌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 량 증가로 타구의 비거리가 늘어났고 변화구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배트를 다루는 기교 또한 향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투수들의 능력들이 능력이 향상된 만큼 타자들의 선구안도 좋아졌다. 그렇다면 아주 자주는 아니더라도 4할 타자가 드물게라도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나 굴드의 진화론적 관점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는 가장 그럴 듯하게 설명한 사람은 미국의 고 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였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의 천적으로도 유명하다. 굴드는 자신의 역작 풀 하우스에서 메이저 리그의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매우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진화라고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진보를 떠올린다. 진화를 통해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로 발전했고 미생물이 미생물이 보다 복잡한 생물로 진화해서 결국 가장 복잡한 사람으로 진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굴드의 생각은 다르다.
굴드에 따르면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이 증가하는 과정이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증가하다 보면 공룡이나 인간처럼 복잡한 생명체가 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잡성이 높은 생명에만 눈길을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박테리아가 전체 생물종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화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정몽준 전 의원이 현역 국회의원일 때 전체 국회의원의 재산 평균을 보도할 때는 그를 포함한 평균값과 그를 뺀 평균값을 따로 보도한다. 한 명의 엄청난 재산 때문에 전체 평균이 높아졌지만 그것이 전체 국회의원의 재산 분포를 파악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종의 다양성이 증가하면 필연적으로 복잡한 생명체가 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굴드는 복잡성의 하한이 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생명체가 아주 단순해지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벽으로 작용한다.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생물종의 구조가 단순했다. 여기서 다양한 종이 출현한다면 어떻게 될 까. 더 단순한 생명체와 더 복잡한 생명체가 같은 빈도로 출현해야겠지만 생물이 생물로서 존재하려면 더 이상 단순해서는 안 되는 벽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복잡한 생명체가 상대적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다. 즉 생명체로서의 단순함의 한계로 인해 다양성의 증가가 복잡성의 증가나 진보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테리아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굴드는 똑같은 논리를 야구에도 적용해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 인간의 육체적 한계라는 육체적 한계라는 벽이 존재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100미터를 5초 안에 달릴 수는 없다.
그런데 지난 수 십 년 동안 타자들의 능력은 꾸준히 향상돼왔다. 굴드는 각종 메이저리그의 통계 자료를 이용해 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4할 타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타자들의 기량이 평균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유는 이렇다. 선수들의 기량이 평균적으로 향상되더라도 야구 경기의 재미를 위해서는 평균 타율을 2할 6푼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에 2할 6푼을 치는 타자와 지금 2할 6푼을 치는 타자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20년대에는 타자들의 기량이 인간의 한계에 많이 못 미치는 상황이어서 평균타율보다 훨씬 더 잘 치는 타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전반적인 서수의 기량이 인간의 한계에 접근해 있으므로 평균 타율보다 훨씬 더 잘 치기가 물리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상황평준화에 의한 변이의 감소, 굴드의 결론은 이것이다. 만약 인간의 한계라는 제한조건이 없다면 선수들 기량이 상향평준화되더라도 변이의 폭이 줄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상향평준화는 변이의 감소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구구단을 막 외기 시작하는 초등학생 저학년들의 구구단 실력은 천차만별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구구단 외기 대회를 열어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입시를 앞둔 고 3 학생들(이왕이면 과학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대회를 연다면 어떨까?
다들 구구단 정도는 너무나 잘하기 때문에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를 가리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더 이상 잘할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즉 상향평준화에 의해 변이의 폭이 줄어들었다.
한 명의 천재보다 팀워크가 유리한 시대
상향평준화에 의해 변이의 폭이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한 사람의 뛰어난 선수에 의존하기보다 전체적인 팀워크를 키우는 방식이 유리하다. 지금의 과학계(특히 물리학계)도 대략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이 태동할 무렵에는 수많은 20대 천재들이 나타나 놀라운 업적들을 이루고 30대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100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그만큼 일급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도 많다. 20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노벨상 수상자의 연령대가 높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한두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자연의비밀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면 기초과학 분야도 점점 대형화 집단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통합과 협력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역이 열리지 않는 이상 천재 한 두 명이 홀연히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명의 천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신화는 한국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시장과 기술이 성숙한 분야에서는 적어도 이 말이 성립하기 어렵다. 이미 상향평준화가 시작되어 엄청난 천재, 말하자면 4할 타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극히 낮을 것이기 때문이다.
4할 타자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엘론 머스크가 여기 해당한다.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연 사람들이다. 혁신적인 시장이 열린 초반에는 누구나 4할 타율을 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이내 상향평준화가 되면 기술적으로 남보다 출중하게 뛰어나긴 어렵다.
지금의 스마트폰 시장이 이와 비슷하다. 애초에 자신만의 리그(흔히 생태계라고 말하는)가 없던 국내 업체들이 지금 고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통합과 협력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할 급의 천재가 한국 기업에서 나오려면
어찌 보면 한국은 굴드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4할 급의 천재를 기대하려면 새로운 시장(기술적 한계가 아직은 요원한)을 과감하게 개척하고 실패를 커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남이 미리 판을 벌려 놓은 시장에 뛰어들어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통합과 협력, 소통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팀워크와 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한국의 기업들은 대체로 후자의 길을 걸으면서 시스템과 통합, 협력의 미덕보다 천재의 출현을 더 기다려 온 것 같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인재가 없다는 기업들의 푸념이 불편하다. 정부도 여기에 장단을 맞추는 바람에 지금 대학은 그야말로 취업을 위한 직업학교로 변신 중이다. 그렇게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인재가 과연 알파고 시대에 우리 기업을 지켜 줄 수 있을까? 지금처럼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변모하는 혁명기에 ...
물론 기업 입장에서야 새로운 기술과 시장이 등장하면 기존의 직원을 자르고 다시 새 환경에 바로 쓸 수 있는 신입을 뽑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뽑은 인재의 유통기한도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당장 현장에서 쓸 수 있는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더라면 위도나 아이 폰은 아마 세상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인재는 상황에 맞게 변신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형 인재, 하나의 기반에서 다양한 표현을 드러낼 수 있는 플랫폼 형 인재가 아닐까? 상황에 따라서는 기업 자체적으로 필요한 인재를 교육하는 수고를 감수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플랫폼 형 인재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이런 인재는 한두 가지의 좁은 영역에서의 전문적인 교육만으로는 결코 길러지지 않는다. 반대로 가장 기본적인 교육만으로는 결코 길러지지 않는다. 반대로 가장 기본적인 교육, 가장 기초적인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아우른 교양교육만이 플랫폼 형 인재를 길러 낼 수 있다.
기업이 지금까지 해 왔던 패스트 팔로워의 틀을 벗어나 퍼스트 무버로서의 면모를 갖추려면 어차피 기존의 지식에 익숙한 인재만으로는 부족하다. 천재가 나타나길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기업 스스로가 4할 타자가 등장할 수 잇는 판을 먼저 벌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누차 말하지만 남들이 미리 벌려 놓은 판에서는 4할 타자가 출현하기 어렵다. 이미 프로야구가 성숙한 한국에서는 더 이상 4할 타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반면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프로야구 리그가 새로 출범한다면 거기서는 쉽게 4할 타자가 나올 수 있다. 퍼스트 무버의 길이란 그런 것이다. 구글이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이 아마도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
바야흐로 프로야구의 계절이다.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와 10개 팀의 짜릿한 명승부를 즐기면서 한 번쯤은 굴드의 교훈도 되돌아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