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스크랩] 이병철 경영대전

루지에나 2010. 9. 20. 03:16

이병철 경영대전

홍하상 지음

바다출판사/2004년 7월/432쪽/12,800원




▣ 저 자  홍하상

중앙대학교 예술대 졸업.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10여 년간 <그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안토니오 꼬레아> 등 270여 편을 썼고, MBC 방송대상 작가상을 받았다.

『상신 리자청』『이병철과 정주영, 카리스마 대 카리스마』『오사카 상인들』등의

저서가 있고, 특히 『이건희 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향하고 있다』는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베트남 등 해외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 Short Summary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그의 취임사에서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가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역설했다.

호암(湖巖) 이병철(1910~1987)은 한일합방이 맺어진 1910년 시골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연수 300석을 갖고 무작정 세상으로 나가 ‘사업’

이란 이름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정미소 사업으로부터 비롯된 삼성상회 간판을

시작으로, 무역업을 주로 하는 삼성물산공사,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 근대화의 출발점이

된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설립, 정권과 연계되어 실패와 희망이 수 차례 교차됐던

한국비료공장의 건설, 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뻗어나가려는 야심으로 도전한 전자와

반도체사업에 이르기까지, 그는 개인적 야망과 동시에 국가적 이익 모두를 욕심내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의 사업 스타일에는 항상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일단 원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

그리곤 수많은 연구와 사전 점검을 거쳐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것,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일단 마음의 결정을 했으면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4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대한민국에 자주 되뇌었던 명구 한 구절을 그대로 실천하고야 말았다.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거대기업 삼성의 경영 매뉴얼을 정착시킨 창업주 이병철. 저자는 거대기업 삼성과

그 창업주 이병철의 ‘모든 것’을 집필하기 위해 2만여 권의 관련 자료를 보았고,

취재를 위해 수차례 일본 현지를 오가며 한 기업과 인물의 짧지 않은 역사를

재정리하였다. 오늘의 삼성그룹을 있게 한 경영 천재의 장대한 일생과 철학이 펼쳐진다.






프롤로그 - 끊임없이 다른 세상이 궁금하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시 북쪽에 있는 중교리의 대지주였다. 이병철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던 1910년 아버지 이찬우(1984~1957)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병철의 집안은 경주 이씨로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을 세거지지(대대로 사는 고장)로 삼음으로써 그 뿌리를 내렸다. 이병철의 조부 문산 이홍석(1838~1897)은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유학자였다. 이병철은 조부가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10살 때까지 『천자문』『사서삼경』『논어』 등을 배우다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병철은 거기서 1년을 다니다가 다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서울 종로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게 된다.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서울 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공부에도 상당히 애를 먹었으나 중동중학의 속성과로 옮긴 후부터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고향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내려가 이듬해인 1928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녕의 후손 박기동의 넷째 딸과 혼례를 올린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한 이병철은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님이 자신의 일본 유학을 반대하자 옆 동네에 살던 조홍제(효성그룹의 창업주)를 찾아가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마침내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1930년 4월 스물 한 살의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이병철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기업가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유학시절 이병철의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다. 고향집에서 매달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류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제법 큰 돈이었다. 유학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언제부터인지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쉬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2학년 1학기에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毬?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이병철은 어느 가을날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홀연히 고향집 대문을 들어섰다.


고향으로 돌아와 맑은 공기와 아늑한 환경에서 얼마간 지내자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후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골패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술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구나.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 회한과 두려움에 그날 밤을 꼬박 새운 이병철은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부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부친은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1. 사업은 시작되었다

아버지로부터 300석의 자금을 받은 이병철은 사업장소로 마산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시 마산시의 도정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합천의 정현용과 박정원과 의기투합하여 1인당 1만 원씩 출자하여 총 3만원의 자본으로 정미소를 설립했다. 일본 정미업자들의 멸시와 식민지 국민으로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은 쌀의 흐름을 파악하고 50여 명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첫 사업에서부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정미소가 잘 돌아가자 이병철은 마산에 운송수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트럭을 20대 구입하여 새로운 사업으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두 사업 모두 순항하자 지배인에게 경영을 맡겼고 이병철은 시간도 남아돌고 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게 허전한 무엇인가는 계속 존재했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사업가가 부딪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이 넘쳐나자 이병철은 새 사업에 착수한다. 당시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하자 김해 인근의 농토가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숫자에 밝았던 이병철은 곰곰이 따져보았다. 논 한 마지기를 50원에 사서 소작을 주면 15원의 소작료가 들어오고 소작료에서 은행 이자 3원 50전을 빼고 세금 1원, 관리비 50전을 제해도 10원의 이익이 남는다. 그야말로 은행융자로 땅을 살 수만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는 평소 신용을 쌓아두었던 식산은행의 하라다 지점장에게 수지계산서를 첨부하여 융자를 신청했고 1년만에 연수 1만석,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병철은 약관 20대에 경남 최대의 대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 3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마침내 중일전쟁이 터졌다.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일본 정부는 은행에 일체의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의 대출도 모두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시장경제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전답의 시세는 폭락했다. 은행 대출금을 모두 상환해야만 했던 이병철은 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전답을 서둘러 처분해야만 했다. 자신이 땅을 샀던 가격보다 싼 값에 팔아야만 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자 할 수 없이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모두 팔아 대출금을 갚고 나니 남은 것은 현금 2만 원과 전답 10만 평뿐이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만 것이다.


“3利가 있으면 3害가 있다” 이병철의 회고다.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세 가지 나쁜 일도 생긴다는 뜻이다. 짧은 기간에 대지주가 되어 부산, 대구 지역까지 농토를 사들이던 청년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병철은 그의 생애 첫 빅 게임에서 크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반추하면서 앞으로의 사업에 커다란 교훈으로 삼았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성장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능력을 갖고 있다. 기업가는 항상 지난 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 봐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고 결코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다.”


그후 이병철의 사업은 무모한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없다. 오늘날 삼성 그룹의 사업 중에서도 투기성 사업은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다. 이 때의 실패가 그의 평생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실패를 경험한 이병철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2. 삼성이란 이름으로

1938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병철은 긴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만주, 베이징을 지나 칭다오, 상하이로 내려갔다. 여행을 하면서 이병철이 눈여겨본 것은 시장이었다. 그리고 만주에는 사과나 건어물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귀국하여 국내의 과일 작황과 어황(漁況)을 치밀하게 조사한 뒤 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 해 3월 1일 교통의 요지인 대구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150평 정도의 목조건물에 자리잡은 삼성상회가 시작한 사업은 무역과 국수 판매였다. 무역은 대구 근처 농촌에서 나는 사과 등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해서 만주와 북경 등지에 내다 파는 것이었고 국수 사업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갖추고 국수를 직접 만들어 소매상들에게 팔았다. 삼성이 세 개의 별이라 국수의 이름도 ‘별표 국수’였다. 그의 예상대로 중국으로 보낸 청과물과 건어물은 잘 팔려나갔고 국수 또한 날개돋힌 듯이 팔렸다. 국수 공장은 늘 24시간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삼성상회 건물을 구입하기 위해 빌린 돈 1만원을 갚기 위해 거의 2년 동안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소음과 먼지, 밀가루 분진으로 가득한 국수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지냈다.


다행히도 삼성상회의 두 사업은 계속 성장을 거듭해 종업원이 40여 명으로 늘어났고 사장, 지배인, 사무직, 생산직의 체계를 갖춘 근대적 기업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병철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구에서 가장 큰 양조장인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오자 이병철은 즉각 인수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경기는 더욱 나빠졌지만 양조사업만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고 경제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져 심지어는 일본인 관료마저도 세끼 밥을 먹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은 더 이상 불가능했고 식솔과 자신의 안위조차 위태로웠다. 마침내 이병철은 삼성상회와 양조장 운영을 지배인 이순근에게 맡기고 고향 중교리로 낙향한다. 그 후 3년 동안 이병철은 그야말로 칩거했다. 훗날 이병철은 『호암어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운(運), 둔(鈍), 근(根)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1945년 8월 14일 저녁, 중교리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와 일본 순사들이 주재소에서 비밀문서 같은 서류를 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 정오,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한국은 마침내 일제의 기나긴 지배 하에서 벗어났다.


3. 장사에도 우선은 사람이다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인구 2,000만 명에 국민소득 60 달러로 경제상황은 극도의 빈사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양조장으로 기반을 잡은 이병철은 광복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지만 모든 것이 어수선하여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시장조사를 계속하며 사업 구상에 몰두했다. 그리고 당시는 물자가 부족했으므로 무역업이야말로 가장 타당성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1948년 조홍제 등과 함께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삼성물산공사는 주거래 대상국인 홍콩과 착실히 교역을 지속하여 불과 1년만에 중견무역업체로 올라섰고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라디오를 켠 이병철은 충격에 휩싸였다.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뉴스였다. 이어진 공산 치하에서 이병철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삼성물산 창고에 있던 설탕, 면사 등 물품 역시 모두 증발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병철은 거의 90일 동안을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개월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이병철은 5대의 트럭을 구입하여 가족과 직원들을 싣고 사흘이나 걸려 대구로 피난을 갔다. 대구에 도착하자 이수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병철은 서울 사업이 바빠 대구의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이수근은 대구에서 청주 월계관과 삼성 사이다를 출시해 막대한 이윤을 올렸고, 빈털터리로 내려온 이병철에게 그간 모아놓았던 3억 원이 담긴 궤짝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을 받아 든 이병철은 감격했다.


“사람을 썼으면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믿고 맡긴다.” 이러한 평소 자신의 경영철학에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바로 이병철 자신이었다. 이병철은 부산으로 내려가 그 3억 원으로 다시 새로운 사업인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한다. 전쟁 중이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포탄 껍데기, 폭격 맞은 공장기계 등 고철들을 수집하여 쇠가 부족한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이병철은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설탕과 비료를 수입했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수입된 물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나갔다. 게다가 운좋게도 전쟁 전에 홍콩에 수출했던 면실박 대금 3만 달러가 거래선으로부터 도착하여 그 자금으로 더욱 많은 설탕과 비료를 수입하여 불과 1년만에 그의 재산은 60억 원으로 늘어났다. 그에게 다시금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자금이 모인 것이다. 60억 원으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4. 의심스러우면 시작하지 마라

이병철은 설탕이나 비료를 수입하여 이익을 붙여 되파는 자신이 과연 사업가인가 자문했다. 사업가란 국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생산해서 판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사업다운 사업, 즉 제조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이병철은 다시 조사에 착수한다. 사전조사와 타당성 검토는 이병철의 주특기이자 또한 오늘날 삼성그룹의 장점이기도 하다. 신목여전(神目如電), “사업에 대한 귀신 같은 안목이 마치 번갯불과 같다”하여 어느 명리학의 대가가 이병철을 그렇게 평했다. 정보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이병철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치밀한 조사 끝에 1953년 4월 그는 마침내 설탕을 제조하기로 하고 결정하고 구영회(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등과 함께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초 8개월로 예정되었던 공장 건설을 6개월만에 마치고 1953년 11월 5일 하루 25만톤 생산 규모의 공장에서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산이라 반신반의하던 소비자들이 먹어보니 외국산과 별 차이도 없고 값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탕의 자급자족을 통해 소중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품질이 더욱 좋아졌지만 제일제당의 설탕 값은 외국산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중역들은 이병철에게 설탕 값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상도의상 폭리를 취하면 안 되거니와 그간 삼성물산에서 번 돈으로 제조업에 투자하여 국민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며, 중역들의 제안을 일축했다. 훗날 제일제당은 일일 생산량 1,200톤으로 세계 1위가 된다.


제당공장이 잘 돌아가자 이병철은 또 다시 새 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신사는 모두 마카오에서 밀수입된 영국산 모직으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녀 이른바 마카오 신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이병철은 미국과 일본 모두에서 성공한 순모 사업을 국산화하면 마카오산의 20%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모직은 면방에 비해 공정이 훨씬 복잡하고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이병철이 모직공장을 설립한다고 하자 선진국의 모직 전문가들은 그를 비웃었다. 영국은 모직 기술을 축적하는 데 150년이 걸렸고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은 미국도 수십 년이 걸려서야 제대로 된 모직 기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54년 9월 이병철은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 때 중역들은 우선 자그마하게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이병철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사업이건 실패의 위험은 따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다. 100%의 자신감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이병철은 사업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계산할 줄 아는 기업가였다. 그는 주위의 건의를 물리치고 최신, 최대의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야만 좋은 제품을 저가로 공급할 수 있고 국제경쟁력도 갖출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대구시 침산동에 7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착공에 들어간 1년 반만에 공장이 완공되었다. 이병철은 공장시설 중에서도 여직원들의 기숙사 환경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 최상급의 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이병철은 여직원은 물론 전 종업원을 가족으로 대우하고 싶었다.


마침내 1956년 5월 공장이 완공되고 제품이 국산 모직 기지 ‘골덴텍스’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가격은 영국제 마카오 양복지에 비해 5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산은 외제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선입관으로 인해 판매가 부진하여 첫해에는 5억 환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1958년 정부가 막대한 외화 지출을 막기 위해 외국산 소모사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골덴텍스가 외제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판을 얻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제일모직은 마침내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들의 의류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넣었으며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외화를 절약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병철은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단 두 기업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를 내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5. 기업가는 좌절에 익숙해야 한다

“사장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만으로 기업은 충분한데 뭘 또 하시려고 합니까?” 누군가 이병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병철이 한국 최대의 비료공장을 세우겠다는 구상을 듣고 던진 말이었다. 그러자 이병철이 대답했다.“나는 우동과 뚝배기 음식, 그리고 생선초밥을 좋아합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만 있으면 그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엔 아직도 꼭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병철은 똑같은 것을 반복하기보다는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성취감을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비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였다. 미국의 원조자금 2억 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 내외를 비료 도입에 쓰고 있었다. 그나마 적절한 도입시기를 놓쳐 농사를 그르치는 일이 빈번했다. 따라서 비료의 자급자족은 농촌의 생계를 좌우하고 곡물의 증산을 위해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이병철은 턱없이 부족한 비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산 35만톤 수준의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정도 규모라야 수출을 하더라도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산 35만톤의 대규모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외화가 필요했고 초기 자금만도 5,0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이병철은 해외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심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 뒤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같은 분단국인 독일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매우 호의적이었고 독일 최대의 철강업체인 크루페 사와의 차관 협상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돈 문제가 해결되자 이병철은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기술과 설비를 제공받기 위해 이탈리아의 국제적 기업 몬테카니 사를 방문했다. 이탈리아에서의 협상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한국 최초의 차관 교섭이 독일과 이탈리아 두 곳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이병철은 기쁜 마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로마 관광을 즐겼다. 그러나 그의 로마 관광은 며칠 가지 못했다. 한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고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쿄에 도착한 이병철은 한국 정세를 보다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사회혼란은 점점 더 깊어지고 한국경제는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이병철은 당분간 도쿄에 머무르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6. 도전의 나날들

4.19 혁명으로 이병철은 하루아침에 부정 축재자로 몰렸다. 언제까지 도쿄에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에 7월 26일 이병철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회 혼란은 극에 달해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경제는 사실상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느 날 검찰에 출두하라는 명령서가 날아왔다. 삼성의 계열사 열다섯 개가 모두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부장검사의 심문이 시작되었다.“왜 탈세를 했습니까?” 이병철은 평소의 소신대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현재의 세제는 전지 재정을 위해 세수의 증대만을 꾀했던 1950년대의 세제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습니다. 현재 법인세, 영업세 등 모든 세금을 합하면 수입의 120%에 달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도저히 기업을 운영할 수 없습니다. 불합리한 세제는 덮어둔 채 거기에 희생되었던 기업만 부정축재로 몰아 단죄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탈세 사실을 사장인 당신도 알고 있었습니까?” “사장 모르게 임직원들이 어떻게 임의로 탈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장검사의 어조가 다소 누그러지며 비꼬듯 한 마디 던졌다. “많은 삼성 사원들을 조사했는데 한결 같이 자기 생각에서 한 일이며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더군요. 참 훈련이 잘 된 회사입니다.”


결국 이병철은 50여 억 원의 추징금을 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여 이병철은 사업에 대한 의욕을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도쿄로 건너가 제국호텔에 머물렀다. 1961년 5월 16일 아침 도쿄에 머무르던 이병철이 골프를 치기 위해 차에 오르자 일본인 운전기사가 한국에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뜻밖의 말을 전했다. 골프장으로 향하는 동안 이병철은 혁명으로 오히려 정국이 안정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내 심정이 착잡했다. 혁명의 주체는 누구일까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으나 마치 망명객처럼 와있는 처지여서 어떠한 해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후 며칠 동안 서울에서 발신되는 뉴스에 주목했다. 혁명의 주체는 군인들이었고 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불과 사흘만에 전국의 치안을 회복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병철은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며칠 후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군사혁명정부에서 파견되었다는 청년 두 명이 호텔에 나타나 이병철에게 즉시 귀국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협박을 하고는 사라졌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그는 귀국을 결심하고 귀국에 앞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이주일 장군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정부의 방침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기업인과 불합리한 세제 하에서도 국가경제 재건에 기여하며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를 뒷받침해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경제인을 처벌하면 경제활동이 위축되어 결코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기업인들의 처벌을 모면하기 위한 궤변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면 나는 기꺼이 전 재산을 헌납하겠다.”


이 편지는 6월 11일 언론에 공개되었고 6월 26일 이병철은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병철을 태운 지프는 전속력으로 달려 명동의 메트로 호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밤을 지낸 뒤 다음날 박정희 부의장을 만났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어서 박정희는 부정축재자 11명에 대한 이병철의 의견을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평소 자신의 소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현재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기업인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 세법 하에서 세금을 모두 납부한 기업은 모두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업을 일으켜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한편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게 해야 합니다. 경제인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고 그러면 세수가 줄어 국가 운영에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경제인들에게 경제 건설의 이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박정희는 이병철의 솔직한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삼성에게 추징금 103여 억 환이 부과되었고 이로써 부정축재 기업인에 대한 혁명정부의 처벌은 일단락지어졌다.


박정희 정부의 최대 과제는 빈곤 타파였다.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고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을까. 경제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경제를 일으켜서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이 때 경제인들은 한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고 이병철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병철은 경제인들이 정부의 지시나 방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 발전 방향과 전략을 실천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외자를 도입해서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이 구상한 ‘기간산업 건설계획’ 안을 박정희에게 브리핑했다. 그후 제1차 민간외자도입 교섭단을 구성하고 미국으로부터의 외자도입은 이병철이 단장이 되어 직접 나섰다.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경제인들과 만나는 동안 이병철은 미국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특별공업지구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울산을 공업지구로 선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혁명정부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1962년 2월 허허벌판 위에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후 3개월 후 6.25 동란중 미8군 사령관을 지냈던 밴프리트 장군을 단장으로 한 미국 기업인들 일행이 울산을 방문했고 빠른 속도로 투자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어렵사리 경제 발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1963년 10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비료공장을 건설해줄 것을 간청했다. 이병철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확답을 미루었지만 당시 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끈질긴 요청 끝에 결국 다시 한번 비료 공장 건설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연산 총 33만톤 규모의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약 40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40개월은 너무 길므로 18개월만에 완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계획이었지만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근면 성실을 신뢰하고 있었던 이병철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은 부지런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18개월만에 반드시 완공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책값을 벌기 위해 이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4,390만 달러의 차관 제공이 확정되자 이병철은 주요부문의 시설을 조금 더 늘려 총 36만 톤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1965년 12월 울산에 세계 최대규모의 한국비료공장이 착공되었다. 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한 김재명 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공사는 빠르게 진척되었고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쯤 되자 목표대로 18개월만에 완성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뜻밖의 사건이 터진다. 1966년 9월 한비공장이 착공된 지 1년만에 80%의 공정이 진척되었고 이제 머지 않아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이 완공된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도쿄에서 필요한 기계들의 선적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 때 느닷없이 서울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보세창고에 있던 OTSA라는 약품이 정부의 허가 없이 시중에 유통되어 큰 소동이 났다는 것이다. 이병철은 급히 귀국했다. OTSA는 특수약품으로 요소비료 제조공정에 필요한 물질이었다. 수입된 OTSA가 협소한 보세창고 안에 다른 많은 건설자재들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는데 현장 담당사원이 당국의 허가 없이 6톤 정도를 임의로 처분했다. 그 과오로 한비는 그해 봄 벌금을 문 적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사건이 가을에 다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신문에서는 한국 제일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연일 대서특필했고 정계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문제로까지 확대했다. OTSA란 일종의 사카린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고가에 팔릴 수 있는 물질이었다. 세간에는 삼성이 OTSA를 처분하여 정치자금으로 쓴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이 일의 배경은 이러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4,390만 달러의 대부분은 현찰이 아니라 공장건설에 필요한 기계류가 대부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미쓰이 물산은 한비가 기계를 사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뜻밖의 공돈이었다. 한데 문제는 당시 외환관리법 상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외화를 들여올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돈을 정상적으로 들여올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100만 달러를 현금 대신 OTSA, 냉장고 등 물건으로 구입해서 들여오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 건은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고 박대통령은 물건을 구입하여 국내에서 처분한 후 1/3은 정치자금, 1/3은 부족한 공장 건설 자금, 그리고 나머지 1/3은 한비의 운영자금으로 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한편 삼성 측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공화당의 정치자금을 주무르던 핵심 인물이 한국비료의 주식 30%를 달라고 요구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정치자금의 확보를 위한 공화당측의 음모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정계는 물론 국민여론이 들끓어 이병철은 마치 국가적 범죄자가 된 것처럼 매도당하는 최대의 시련기를 맞았다. 결국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러자 정부는 한비를 완공한 후에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이병철은 곤혹스러웠으나 일단 시작한 사업이므로 농민을 위해서라도 완공하겠다고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공사 현장으로 내려가 근로자들에게 결코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7년 3월 한비는 완공되었다. 그리고 이병철은 비통한 심정으로 기념사를 읽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완공된 비료공장은 이병철의 손을 떠나 정부에 귀속되었다. 어찌 되었든 완공된 한국비료는 국내 자급자족은 물론 한국의 비료 수출에도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그후 한국비료는 경영에 실패하여 다시 민간의 공개입찰에 나오게 되고 1990년 삼성그룹은 2,400억 원의 돈으로 다시 한비를 인수한다. 한국비료 헌납 사건으로 이병철과 박정희는 상호신뢰에 금이 가 이후 두 사람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병철에게는 권력에 대한 배신감이 평생 동안 따라 다녔다. 훗날 이병철은 “한비 헌납 후 명분만 가지고 무리한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했다.”고 술회했다.



7. 기업가의 욕심은 죄가 아니다

1970년대, 이병철은 한국에서도 전자산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자산업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에 가장 적합한 산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하자 기존 전자부품 조립 메이커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국회의원까지 동원하며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저지했다. 정부도 이상하게 삼성의 전자산업 허가 요청에 대해 지지부진 시간을 끌었다. 이병철은 박대통령을 찾아가 전자산업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라고 설득했고 박대통령은 전자산업을 전면개방하라고 지시했다.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삼성전자는 창립 9년만인 1978년에 흑백 TV 200만 대를 생산하여 일본의 마쓰시다전기를 앞섰고 1981년에는 1,000만 대를 생산하려 세계 정상에 올랐다. 1984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컬러 TV를 500만 대, 흑백 TV를 1,500만 대를 생산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VTR, 오디오, 냉장고, 에어컨 등을 생산했다. 이병철은 삼성전자를 세계 정상급의 전자업체로 육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기술 혁신이었다. 이병철의 기술에 대한 집념은 매우 강해 당시 삼성종합기술원을 설립했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삼성전자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네 번째로 VTR을 개발해낸다.


출처 : 이병철 경영대전

글쓴이 : you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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