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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루지에나 2012. 9. 6. 10:49

 

<오세암>

 

 

 

만해 한용운은 약육강식의 열강의 침탈 앞에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한 1879년에 태어나  60세로 몰하기 까지

그의 생애는 오로지 겨레와 민족의 독립 앞에 바쳐진 구도와 그 실천의 삶을 살았다.

평화 · 평등 ·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는 선사로서의 면모와 민족지성으로서의 독립운동,

그리고 근대문학 한 진경으로 님의 침묵에 이르는 시인으로서의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항일 민족운동의 최일선을 지키며 그 삶 자체가 저항이며 운동이었다.

 

  그는 고향 홍성에서 서세동점하던 국제정세 속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왕조의 비참함을 지켜보았다. 이에 그는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출가를 통한 민족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었다. 초기에는 시베리아와 일본 탐방등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일제의 국권강탈을 겪으며 본격적인 민족운동의 무대로 들어가게 된다.

 

  한용운의 민족운동의 첫걸음은 임제종운동의 주도로 나타났다. 임제종운동은 일본불교가 한국불교를 통제, 관리하여 민족불교를 일본불교로 개조하려는 것에 저항한 불교운동이다. 이 때 한용운은 전라도, 경상도 일대의 사찰과 승려들을 추동하여 그 반대 운동에 나서도록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그 대응 세력인 임제종운동을 견인하였다. 이로써 민족불교의 자존이 유지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의 자주화를 주장, 점차 그 무대를 넓혀 민족자존과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제 식민지정책의 허상을 비판하며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불교계 대표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그는 기독교,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기획, 주도하였다. 민족대표로서의 한용운은 3.1운동을 성사케 하였고, 나아가서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추서하여 3.1운동을 방향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 근대학교인 중앙학림 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선두에 서게하여 결과적으로 전국의 사찰이 만세운동에 참여케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옥중에 수감되어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민족대표로서의 추상같은 절개를 지켰다. 또한 『조선독립의 서』를 작성하여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게재케 하였다.

 

  출옥 후에도 그의 민족운동은 쉬지 않았다. 민립대학설립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창씨개명 거부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특히 불교계의 유일한 항일 비밀결사체였던 '만당'의 당수로 추대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행적이다. 이렇듯 그의 불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는 민족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독립에 대한 갈망, 매서운 지조는 민족 지성인의 표본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제공하는 배급마저 거부하였던 지사적 저항정신은 한 겨울의 매화 같은 것이었으며 식민지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활화산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은 승려였다. 백담사에서 삭발염의 한 그는 불교의 교리, 사상과 소양을 익히는 한편 다양한 경전의 섭렵과 참선 수행에도 정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선시대 산중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의 여러 문제점을 파악하므로 마침내 민족불교, 대승불교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그 시대의 빛과 보살의 역할을 불교가 해야 한다는 자신의 입론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런 소신에서 나온 것이 1913년에 간행된 『조선불교유신론』이었다. 이 유신론에서 그는 불교의 개혁을 과감하게 주장하였거니와, 기존 불교의 과감한 파괴와 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불교로 나아갈 것을 역설했다. 그는 산중불교, 승려중심의 불교에서 도회지 중심의 불교, 대중 중심의 불교로 나갈 것을 강조했다. 즉 대중불교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만해의 불교개혁은 그 이후에도 다양한 업적으로 나타났다. 팔만대장경을 요약, 정리하여 대중들이 쉽게 읽게 하였던 『불교대전』의 발간, 불교대중화 및 혁신을 기하기 위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의 조직, 조선선종 포교당 포교사 취임,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한 잡지 『유심』 발간 등은 그 예들이다.

 

  3.1운동으로 옥중에 수감되었다가 나온 이후에도 그의 불교개혁에 대한 열정은 쉼이 없었다. 그는 우선 전통 선의 부흥, 개혁을 위해 등장한 선학원에 관련을 맺으면서 역경과 불교대중화를 위한 단체인 '법보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불교 유신을 위해 등장한 청년학승들의 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도 취임했다.

 

  그리고 1930년대 초반에는 당시 불교계 유일한 잡지인 『불교』를 펴내던 불교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사의 사장에 오른 그는 기존의 안일한 편집 원칙을 개혁하여 불교계 모순, 현실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였다. 이때부터 『불교』지는 식민지 불교정책과 그에 안주하였던 식민지 지주층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나약하고 안이한 불교의 체질을 개혁하기 위한 불교개혁론을 기고하고 학승들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한용운의 이러한 활동은 식민지 당국, 그 지배에 안주한 교단을 위협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1930년대 후반, 불교사 사장을 사임하게 된다.

 

  만해 한용운은 30대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할 당시부터 50대 후반까지 불교개혁을 위한 다양한 기고, 강연을 통한 열정적 행보는 일본 불교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 불교의 취약성과 허약함을 쇄신, 극복하려 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은 조선불교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처절한 노력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시인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문학은 시작(詩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을 보면 그 장르가 시, 시조, 소설, 수필, 한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님의 침묵』과 같은 불멸의 시집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환경으로 보면 특이한 일이다. 한용운은 제도권의 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더구나 문학 창작 등과 관련된 교육을 받은 적이 일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이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장과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한용운은 출가하기 이전, 고향에서 전통 한학을 수학 하였다. 향리에서의 체계적인 한학 수학과정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출신가문이 몰락한 양반, 잔반이었기에 집안 어른으로부터의 가정교육의 영향도 일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18세 무렵에는 이와 같은 한학의 실력을 인정받아 향리에서 한문 서당의 훈장으로도 활동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용운은 유년시절, 청소년기에 익힌 한학 공부가 자연 문학적 소양이 되었다고 보인다. 한학은 단순한 한문이 아니고 동양사, 동양철학, 동양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집대성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용운은 출가 후에도 불교 경전을 보다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의 한시를 보면 출가 초기부터의 작품이 적지 않다. 이는 그가 승려로 입문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시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수학 결과가 자연적으로 만해 문학의 근본으로 작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한용운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탐구정신은 물론 세계문명, 정세, 정보 등에 대하여 적극적인 수용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에 발간한 『유심』의 내용을 보면 만해의 기고문, 신시가 다수 나온다. 이것은 그가 당시 일본을 거쳐 수입된 새로운 문학사조나 형식에 대한 나름의 수용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용운의 문학적 소양 외에 유의할 것은 문학에서도 그의 도전 정신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유심』지에 다수의 신시를 게재한 것, 1925년 백담사에 칩거하며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하고, 창작한 것은 남다른 문학적 도전정신에서 기인하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십현담주해』는 그의 한학, 선(禪)적인 자질에서 나온 것이지만 『님의 침묵』에 수록된 66편의 시를 짧은 기간에 완성하여 출판한 것은 그의 문학적 도전정신, 청년정신으로 가능하였다고 본다.

 

  한용운의 문학적 평가, 의의는 한국 문학사에서 다양한 관점에서 시도되어 왔고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에서는 한용운의 문학인으로서의 자질과 환경, 문학적 정신이 배태된 배경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나는 일찍이 우리 불교를 유신(維新)하는 문제에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성취할 가능성을 지니고도 있었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같지 않아, 당장 세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시험삼아 한 무형의 불교의 새로운 세계를 자질구레한 글 속에 나타냄으로써, 나의 쓸쓸함을 스스로 달래고자 할 뿐이다.


무슬 매화(梅花)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養生)의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이 노설은 말할 것도 없이 매화나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이 전신을 이렇게 태우니, 부득불 이 한 그루 매화나무 그림자로 만석(萬石)의 맑은 샘 구실을 시킬 수밖에 없다.


요즘 불교계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데, 우리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우리 승려 동지중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 자가 혹시 있다면 이 매화나무 그림자로 비추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보살의 수행인 여섯 바라밀다(波羅蜜多) 중에서 보시(布施)가 제일이라고 들었다.
나도 이 매화나무의 그림자를 보시면 공덕으로 지옥은 충분히 면하게 되지 않을까.

 

1910년 12월 8일 밤 「조선불교유신론」서문      

 

 


선생 댁에서 제자들이 밤늦게까지 말씀을 듣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새벽에 깨어 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구들목에 눕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선생은 윗목에서 꼼짝 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것이 일수였다고 한다.

김관호의 [심우장 견문기]

 

스님은 광복운동의 선구자인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5일장을 지냈다.(1937.3.3)

慈悲인 同時에, 大勇猛이라야한다

忍辱인 同時에, 精進이라야한다

我空인 同時에, 唯我獨尊이라야한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 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님의 침묵」서시, [독자에게]    

 


나는 소설을 쓸 소질이 있는 사람도 아니요, 또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니올시다.
왜 그러면 소설을 쓰느냐 반박하실지도 모르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동기까지 설명하려고는 않습니다.
하여튼 나의 이 소설에는 문장이 유창한 것도 아니요, 묘사가 훌륭한 것도 아니요, 또는 그 이외라도 다른 무슨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로서 평소부터 여러분께 대하여 한 번 알리었으면 하던 그것을 알리게 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많은 결점과 단처를 모두 다 눌러보시고 글 속에 숨은 나의 마음까지를 읽어주신다면 그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면서(1935.4.8)   

 


"이놈아 말 들어라.

사람이 세상에 났으면 사람 노릇해야 한다.

사람의 도는 정의와 양심이다. 정의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너희같은 놈들은 신상위험은

고사하고 조금만 이(利)하면 양심에 부끄럼도 모르고

짐승의 짓도 하지마는 나는 정의가 생명이라 위험을

겁내지 않고 못할 짓은 죽어도 못한다.

너도 조선 놈으로 한껏 양심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 말고 네 아비 총독 놈에게 너를

욕했다고 잡아다가 죽이자고 하여라"

김관호의 「심우장 견문기」에서     

 

 


기미운동이 폭발될 때에 온 장안은 대한독립만세로 요란하고 인심은 물끓듯 할 때에 우리는 지금의 태화관 당시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다 경찰부에 포위되어 한쪽에서는 체포되어 자동차로 호송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나도 신체의 자유를 잃어 버리고 자동차에 실려 좁은 골목을 지나서 마포형무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입니다. 열두서넛 되어 보이는 소학생 두명이 내가 탄 자동차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두손을 들어 王 부르다가 일경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부르다가 마침내는 잡히게 되는데, 한 학생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옆의 학생은 그래도 또 부르는 것을 차창으로 보았습니다.


그 때 그 학생들이 누구이며, 왜 그같이 지극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보고 그 소리를 듣던 나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 하였습니다. 나는그 때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에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조선일보, 「평생 못 잊을 상처」에서 (1932.1.8)     

 

문 :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문 :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어록(1919.5.8)     

 

 


만해(卍海)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조종현의 「만해 한용운」이란 글의 "서시"에서

 

 

 

 

 

       만해 연보

 

[1879~1900]

1879(1세)

8월 29일(음력 7월 12일)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 사이의 2남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청주, 어린시절의 이름은 유천, 호적이름은 정옥.

1884(6세) 

향리 서당에서 한학 수학.

1886(8세) 

홍성읍내로 이주, 한학 공부 지속.

1887(9세) 

통감, 대학, 서상기, 서경 등을 공부.

1892(14세)

전정숙과 결혼.

1896(18세)

향리의 서당 선생,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가출. 보은의 속리사로 입산.

1897(19세)

월정사 강원에서 수학.

1898(20세)

설악산 백담사로 이전, 사미계 수계(법명, 奉玩).

 

[1901~1910]

1903(25세)

세계일주를 위한 시베리아행 도전,
귀국 석왕사 칩거, 참선.

1904(26세)

일본행 계획, 실패. 홍성으로 귀향, 홍성 재 가출.
아들인 전보국 출생.

1905(27세)

1월 26일 백담사 재입산, 비구계 수계(은사 김연곡으로, 계사는 전영제)
4월, 이학암(백담사)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을 배움.

1907(29세)

건봉사에서 최초의 안거 수행
만화선사로부터 전법(당호, 龍雲).

1908(30세)

4월 유점사에서 서월하에게 화엄경 배움.
5~10월 일본으로 시찰 겸 유학(임제종대학).
10월 귀국, 건봉사에서 이학암에게 화엄경과 반야경 배움.
12월 10일 경성명진측량강습소 개설, 소장.

1909(31세)

7월 30일 표훈사 강원 강사.

1910(32세)

3월, 9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건백서 제출.
9월 20일, 화장사 화산강숙 강사.
12월 8일,「조선불교유신론」탈고.

 

[1911~1920]

1911(33세)

원종의 조동종 맹약에 반대하는 임제종운동 주도. 임제종 종무원의 서무부장 겸 관장 서리,
3월 16일 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 종무원을 범어사로 이전.
10월 만주지방 순행.

1912(34세)

5월 임제종중앙포교당 개설
6월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일제 외압으로 선종중앙포교당으로 명칭 변경.
8월 불교대중화를 위해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 결성, 좌절. 통도사에 머무르며 대장경 열람.

1913(35세)

3~4월 「 조선불교월보」에 <승려의 단결>(「 조선불교유신론」일부 원고) 기고.
이 때에 처음으로 필명, 자호인 萬海를 사용.
5월 19일 통도사 강원 강사에 취임.

1914(36세)

4월 조선불교강구회 총재.
4월 30일「 불교대전」을 간행(범어사를 발행처로).

1915(37세)

5월 19일 조선선종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

1917(39세)

4월 4일 신문관에서 「정선강의 채근담」발간
12월 3일 오세암에서 좌선중 깨달음.

1918(40세)

9월 월간 교양잡지「유심」을 발간, 발행인(3호로 중단)

1919(41세)

1월 최린 등 천도교측과 3·1운동 논의.
2월 불교, 유교측의 민족대표 포섭. 공약삼장 추가.
3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참여, 주도. 일제에 피체.
7월 10일 <조선독립 이유서> 작성.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

 

[1921~1930]

1921(43세)

12월 22일 석방, 선학원에 머무름

1922(44세)

3월 24일 역경과 불교대중화를 위한 단체인 법보회 발기.
3월 29~30일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발기인.
11월 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

1923(45세)

3월 31일 민립대학기성회의 중앙부 집행위원에 피선, 4월 2일 상무집행위원에 피선.

1924(46세)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

1925(47세)

6월 7일 오세암에서「십현담주해」탈고.
8월 29일「님의침묵」탈고.

1926(48세)

5월 15일 법보회에서「십현담주해」발간(비매품, 법보시)
5월 20일 회동서관에서「님의 침묵」발간..
6월 7일 선학원에서 6·10만세운동 예비검속으로 구속.

1927(49세)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2월 15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
6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피선.

1928(50세)

8월「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약지」편찬, 발간.

1929(51세)

12월 광주학생운동의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

1930(52세)

5월 항일비밀결사 만당의 당수로 추대(비공식).
서울 종로의 사직동에 칩거.

 

[1931~1940]

1931(53세)

6월「불교」의 발간처인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
7월 전주 안심사의 한글경판 발견, 확인.

1932(54세)

12월 안심사(전주)에 보관되었던 한글경판을 인출.
「불교」지 선정 불교계 대표인물 선정에서 절대 다수로 1위 차지.

1933(55세)

7월「불교」휴간으로 불교사 사장에서 퇴직.
유숙원과 결혼(재혼).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머무름.

1934(56세)

9월 딸 한영숙 출생.

1935(57세)

4월 9일,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 연재 시작(1936년  2월 4일까지).

1936(58세)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 연재(50회로 중단).
신채호 묘비 건립(비용은 조선일보의 원고료로 충당, 글씨는 오세창이 씀).
7월 16일, 다산 정약용서거 백년기념회 개최(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1937(59세)

3월 만주의 항일운동가 김동삼이 서거하자, 유해 인수하여 장례를 치룸.
「불교」신1~2집에 소설, <철혈미인> 연재.

1939(61세)

청량사에서 회갑연 개최(음력 7월 12일). 다솔사에서 회갑 기념식수.
조선일보에 삼국지를 번역, 연재 시작(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시까지).

 

[1941~1944]

1942(64세)

신채호 유고집 발간 추진, 좌절(최범술, 박광, 신백우와 함께).

1944(66세)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그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4년 입적 이후]

1948

만해한용운전집 간행 추진위원회 조직, 자료수집(6·25로 중단)

1962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정부에서 추서

1967

10월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대선사비 건립

1971

만해한용운전집간행위원회 재결성, 자료수집

1973

7월 5일「한용운전집」(전 6권)을 신구문화사에서 간행

1974

창작과비평사에서 만해문학상 제정

1979

9월 10일「한용운전집」증보판 발행

1980

만해사상연구회 결성(신구문화사)

1991

만해학회 결성

1995

제1회 만해제 거행(홍성), 만해사(생가) 건립

1996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결성(백담사)

1999

제1회 만해축전 개최(백담사), 만해대상 시상

2003

만해마을 준공(백담사 입구)

 

 *자료: 만해사상실천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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