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글픈 730만 베이비부머

루지에나 2012. 11. 17. 15:35

환란폭풍 견뎠지만 노후 통장은 빈털터리

서글픈 730만 베이비부머

 

베이비부머들은 외환위기 때문에 인생이 통째로 바뀐 세대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부머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게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에 위기를 맞았다. 와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벌어졌던 구조조정은 베이비부머 직장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정씨처럼 어떤 이는 대기업에서 정리해고 된 후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지금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회사에서는 살아남았더라도 냉정한 평가제도 도입으로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회사에 대한 신뢰와 정년퇴직까지는 근무할 수 있을 거란 신뢰 역시 잃어버렸다.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통보하는 위치에 있다가 2010년 은행에서 퇴직한 신 모 씨는 3년간을 평가해 계속 잘라내는데 초등하교 예방주사 맞는 것과 똑같은 기분이라며 계속 10%씩 잘려 나오면 결국코너에 몰리게 되는데 앞날을 미리 대비해야지 그 때가서 어떻게 되계지 하는 것은 비극적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베이비붐 세대는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직업의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경험한 첫 번째 세대가 됐다. 이들은 기족 부양에서도 샌드위치 세대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노부모 부양책임과 관련해 자녀가 가족에게 부양책임이 있다는 응답은 51.7%에 달할 정도다. 하지만 자신들 노후를 자녀가 수발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3.6%에 불과했다. 이들은 부모는 부양하지만 자녀에게는 노후 보장을 기대하지 않는 일방적인 부양제공의 가치관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생계를 위해 베이비부머들은 퇴직 후에도 경제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6년까지 대기업 인사부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신 모 씨는 당장 재수를 하고 있는 딸 대학교 등록금을 걱정하고 있다. 퇴직 후 중소기업에 다니다 부동산중개소를 차린 신 씨는 생활비로 300~400만원을 버는데 부동산을 통해 얻는 수입으로는 가계부가 적자와 흑자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딸이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 부담까지 겹쳐 노후를 위해 연금을 들거나 저축을 하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신 씨는 딸 대학도 마치고 시집도 보내야 해서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씨처럼 자녀 부양 등에 치중하다 보니 베이비부머들은 정작 노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공적연금 가입 현황을 조사한 결과 13.7%는 본인과 배우자를 포함해 전혀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보다는 가입 율이 높지만 미 가입 율이 48.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경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베이비부머는)제한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준비가 필요한 시점에 놓여있다며 자녀에 대한 경제적 부양과 자신의 안정적인 노후생활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으며 공적인 노후소득 보장만으로는 자신이 기대하는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냉철한 판단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베이비부머들은 80% 이상이 도시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의 각박한 삶에서 벗어나 귀농을 통해 여생을 대비하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많다. 베이비부머가 선호하는 노후 주거지로는 농어촌을 45.3%로 가장 많이 꼽았고 중소도시가 24.7%로 그 뒤를 이었다. 대도시는 17.2%로 응답이 많지 않았다. 군인 출신으로 강원도 횡성에 400평 남짓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변 모씨(60)는 베이비부머들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30년 가까운 군 생활 탓에 변 씨는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았고, 제대 후엔 3년 가까이 무직으로 지내야 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은 취업고용지원센터에서 계약직 상담원으로 일하며 방황했다. 군에 있을 땐 낮지 않은 계급이었는데 사회에선 적응을 못해 변 씨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 집에서 농사를 지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농사를 지으면 수입도 수입이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귀농을 결심했다. 변 씨는 지난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서울농업기술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귀농에 대한 사전 지식을 쌓는 등 차분히 귀농을 준비했다. 생계를 이어가기에 부족한 환경은 아니지만 일을 통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거나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봉사를 통해서라도 사회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베이비부머들도 생겨나고 있다. 베이비부머가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6.29선언을 쟁취한 사회민주화 투쟁과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경제성장의 주역을 하면서 형성된 문제의식과 사회적 의무감 때문이다. 특히 주로 자신이 직업을 통해 쌓은 전문성에 착한 일을 보태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한 대기업에서 노조활동을 하고 있는 박 모 씨는 지금은 회사라는 울타리에 갇혀 하지 못하고 있지만 퇴직 후에는 일하면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든 사회봉사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14년 가까이 무직으로 지내온 김숙자씨는 단순한 일자리를 통해서라도 자기 존재를 찾고 싶어하는 사례다. 90년대 말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전업주보로 지내오던 그는 사무직 등 단순 업무 위주로 일자리를 알아 볼 생각이다. 김 씨는 집에 오랫동안 박혀 있다 보니 무기력함을 버릴 수 없었다며 사회에 내 존재를 뚜렷이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