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스크랩] 장태완장군의 가족 비운의 현대사

루지에나 2013. 7. 26. 04:49

장군의 가족 비운의 현대사
Under Fire | 2012/01/18 10:27 capa1954

 

 

고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부인 이병호씨 (12·12 쿠데타와 나)

장군의 가족 비운의 현대사

쿠데타가 남긴 그늘은 깊고 어두웠습니다.



17일 오전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병호(77)씨는 지난 1979년 전두환·노태우 일당이 저지른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다 모진 고초를 겪었던 고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부인입니다.


이씨가 투신 직전 남긴 유서에는 볼펜으로 “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다. 오래오래 잘 살아”라는 내용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씨는 지난 2010년 7월 장 전 사령관의 별세 이후 심한 우울증을 앓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씨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장 전 사령관 가족사에 얽힌 비극 때문입니다. 장 전 사령관이 쿠데타 진압에 실패한 후 본인은 물론 가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평생 천직으로 알던 군을 떠나 강제 예편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장 사령관의 부친은 아들의 강제 전역 소식에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곡기를 끊어 1980년 4월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전역후 6개월간의 가택연금을 당하는 동안에도 공부를 잘해 서울대 자연대에 진학했던 외아들 성호(당시 20세)씨는 1982년 1월 집을 나가 행방불명된지 한 달만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경북 왜관 낙동강 근처 산기슭에서 숨진 채 발견됐죠.


장 전 사령관은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얼어 있는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부벼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주며,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들였다. 얼마동안 빨다보니 아들의 눈안에서 사탕만한 모난 얼음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아들놈이 마지막 흘린 눈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양 눈과 코와 입을 녹여 가는 동안 아들의 몸 속에서는 여러개의 얼음이 나왔고 그 얼음을 삼키고 또 삼키고 있는 사이에 천안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흉한 자식의 시신을 제 어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가슴, 배꼽 등을 계속 빨아주면서 얼음장 같은 시신을 녹이다보니 어느덧 차가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12·12 쿠데타와 나' 298쪽)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가족 사진 (12·12 쿠데타와 나)


이씨도 생전 한 여성지와 했던 인터뷰에서 당시의 고통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성호가 집을 나간 지 꼭 한달째 되던 2월9일 오후 4시 경에 전화벨이 울려 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어요. 서울대학교 당직실에서 아들의 죽음을 알려온 전화였죠.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가지러 나설 때 모포 한 장을 내주면서 나는 미친듯이 소리쳤어요. ‘그 아이가 어떤 지경에 놓여있던 간에 그대로 이 모포에 고히 싸서 데리고 와요. 만약 밖에서 화장을 해서 장례를 치루는 일이 있으면 나는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고 말테니 그대로 데려와서 내가 쓰는 큰방 내 눈 앞에 눕히라고요’하고 말을 했죠. 남편이 자식의 시신을 안고 돌아온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경이었어요. 죽은 아들의 몸은 얼어서 돌덩어리 같았어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어요.”


“그 나이에 그렇게 간 것이 기가 막혀서···.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은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다더니 우리 내외 가슴엔 수만 개의 못이 박혀 이젠 더 이상 못박을 자리도 없어요. 용인에 있는 아이 묘 옆에 우리 내외의 자리도 같이 마련해 놓았어요. 남편은 국립묘지엔 묻히고 싶지 않다고 해요. 오죽 한이 사무쳤으면 그런 말을 하시겠어요.”


“이렇게 우리 가정에 비극이 겹치고 군인으로서도 도중 하차하고 말았지만 저나 죽은 아이나 남편이 한 일은 옳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옳은 일을 하고도 타의에 의해 예편당하고 아버님과 지식까지 잃은 이 한은 어떻게 해준들 보상이 되겠어요? 남편이나 저나 언젠가는 못다한 얘기를 다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직···.” (우먼센스 1991년 4월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언제나 장 전사령관을 괴롭혔습니다. 사건 직후부터 화병에 시달렸던 그는 하루 세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독한 술을 들이켰습니다. 수면제를 먹고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십여 가지의 약을 달고 살아야했죠.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 1987년에는 10여 시간의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고, 2008년 6월 폐암으로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2년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장 전 사령관의 사인은 폐암이었습니다.


생전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말하곤 했던 장 전 사령관 가족의 비극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쿠데타 세력의 몰염치에는 차라리 연민이 느껴집니다.


이씨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되었습니다. 장례는 천주교식으로 치러지며, 오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에 있는 장 전 의원의 묘에 합장될 예정입니다. 장 전 사령관의 묘 인근에는 지난해 8월 세상을 떠난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묘도 있습니다. 안 전 실장은 한국 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긴 신군부 세력의 일원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냈습니다.

출처 : 역사바로세우기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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