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마키아벨리 군주론

루지에나 2015. 7. 12. 13:26

군주론,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마키아벨리- 反浦雜記

군주론

점토질의 사상가 마키아벨리

사상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 크게 보아 각자의 사상과 이념이 비교적 명확히 정리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이다. 카를 마르크스를 두고 자유주의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존 로크에게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장 자크 루소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계몽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이른바 사상적 가소성(可塑性)이 뛰어난 경우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사상이 아주 다양한 면모로, 때로는 완전히 상반되는 방향으로까지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뜻이다. 딱딱한 화강암이기보다는 무른 점토질의 사상가라고나 할까.

사상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앞의 경우보다 뒤의 경우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낀다. 어떻게 한 사람의 사상이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내적 모순처럼 보이는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우리가 그/그녀에게 끌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어떤 사상가 또는 텍스트의 의도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곧 그/그녀의 사상이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용될 수 있는 강력한 성형력(成形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아마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문필가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를 따라올 인물은 거의 없을 듯싶다. 사람들은 그에게 본질적으로 다른 수많은 이름들을 붙여 주었다. 한쪽에서 그를 가리켜 권모술수가, 냉혹한 정략가, '권력 국가'의 선구자, 심지어는 악마의 사도라고까지 폄하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근대 정치 관념의 창시자이자 세속적 역사관의 선각자라고 칭송한다. 그를 공화주의자라고 하는가 하면 군주제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관한 제일 큰 아이러니는 비록 그가 '마키아벨리즘'의 창시자로 비난받아 왔지만 그의 처세를 보면 전혀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의 판세를 날카롭게 읽어 내는 현실주의자의 혜안을 지녔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 하나를 추스르는 데는 실패했던, 어떤 면에서 매우 이상주의적이면서 인간적이기도 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군주론』은 어떻게 씌어지게 됐나

마키아벨리는 도미니쿠스 교단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급진 공화파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1)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이어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이던 10인위원회2) 서기국의 서기장도 겸하게 된다. 특히 그는 1502년 이후 종신직 곤팔로니에레3)가 된 피에로 소데리니의 신임을 받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독일, 로마, 시에나, 로마냐 등지에 파견된다. 그는 또 시민군 조직의 입안 및 구성에도 깊이 관여한다. 『군주론(Il principe)』을 비롯한 이후의 저술들은 바로 이러한 때에 겪은 다양한 현실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바사리가 그린 「로렌초 메디치」.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1512년 소데리니 정권이 몰락하고 메디치 가가 복귀하자, 마키아벨리는 모든 관직에서 축출된다. 이어서 반(反)메디치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에다 고문까지 당하게 되지만, 이듬해 3월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함에 따라 특사로 풀려난다. 그는 이후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작은 시골 농장에서 원치 않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쓰라렸던 바로 이 시기에 그의 명성을 높인 저작들이 쏟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군주론』을 필두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 『만드라골라』, 『전쟁의 기술』, 『피렌체사(史)』 등이 이때 씌어진 주요 작품들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감옥에서 풀려나 농장에 틀어박힌 뒤 몇 달 사이의 짧은 시간 안에 씌어졌다. 이에 관련된 정황은 그가 1513년 12월 10일 절친한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실 이 편지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히는데,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갔는지 그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탁월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어설픈 요약보다는 비록 번역이지만 직접 그 원문을 읽는 편이 백번 나으리라.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 일어나 요즘 베어 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과든 언제나 무슨 말썽거리라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아닌가. ···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렀다가 나는 새를 잡는 곳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에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 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 것 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에는 다시 그 술집으로 가는데, 그곳에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주한 한 사람, 방앗간지기 한 사람 그리고 가마 굽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서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 그뿐인가. 돈 한 푼을 두고는 종종 드잡이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 소리가 멀리 산카시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여신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나는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이 반겨 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다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어 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것을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원래 대인(大人) 로렌초의 셋째 아들 줄리아노에게 바치려 했다가, 뒤에 마음을 바꾸어 대인 로렌초의 장손인 동명(同名)의 로렌초에게 헌정하였다. 그가 메디치 가 군주들에게 이 책을 바치려 한 것은, 물론 자신을 다시 공직에 천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메디치가가 축출된 후의 공화정에서 봉직하고, 그들이 돌아온 뒤에는 반(反)메디치파로 몰려 투옥에다 고문까지 당한 그가 다시 그들에게 책을 바치는 행위가 기회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현재사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바탕으로 "국정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간이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겠다는, 정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메디치 가에도 득이 될 것이라는 계산과 함께. 그러나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군주론』은 얼핏 보면 군주국의 종류와 권력 유지의 방법에 대한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설명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지를 잘 뜯어보면 그가 극히 교묘한 구성을 통해 자신의 논점을 알리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군주국만을 다루겠다고 말한다. 군주국은 다시 세습 군주국과 신생 군주국으로 나뉘지만, 앞의 경우는 대체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점은 뒤의 경우에 맞추어진다(제1, 2장). 그는 신생 군주국을 다시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과 기존의 세습 군주국에 병합된 경우, 즉 혼합 군주국으로 구분하면서, 제3장부터 제5장까지의 논의를 혼합 군주국의 유형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이다. 그는 제6장에서 이를 다시 "자신의 군대 및 비르투에 의해" 획득된 경우와 "다른 사람의 군대 및 포르투나(fortuna)에 의한" 경우로 나눈다. 비르투란 힘, 역량, 능력, 활력, 에너지, 용기, 과감성 등을 뜻하며, 포르투나는 비르투 영역 밖의 운 또는 어떤 비합리적인 힘을 의미한다. 신군주에게는 무엇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물론 비르투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보다는 오히려 포르투나에 대해 논하겠다고 언명한다. 왜냐하면 현대 이탈리아 군주 중 자신의 군대 그리고 비르투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을 세운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의 군대 그리고 포르투나에 의한 경우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실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 체사레 보르자이다(제7장).

마키아벨리의 유형 구분론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른다. 그는 제8장과 제9장에서 각각 "사악한 방법으로 군주국을 획득한 인물들"과 '시민 군주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라쿠사의 유력 시민들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던 아가토클레스나 자신을 길러 준 외숙부를 죽이고 페르모4)를 장악한 올리베르토는 비르투에도 포르투나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무자비한 방법을 통해 군주가 된 경우이다. 하지만 이렇게 폭력에 의하지 않고도 다른 시민들의 도움으로 군주가 되는 길이 있다. 상층 유력 시민들의 야심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평시민들의 호의에 기대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때 군주가 정체를 시민정에서 절대정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시민 군주의 힘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경고와 함께, 현명한 군주라면 "언제나 그리고 때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정부를 필요로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는 조언까지 곁들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서두에서 A는 'A1이거나 A2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 뒤, 이 중에서 A1을 배제하고 다시 A2는 'B1이거나 B2이다'라는 명제로 나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B1을 배제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국가의 유형을 계속 세분해 나간 끝에, 결국 "다른 사람의 군대 그리고 포르투나에 의해" 획득된 신생 군주국으로 논의를 귀결시킨다. 그리고는 이에 덧붙여 군주의 자리는 얻었지만 오직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경우와, 시민들의 동의에 의한 경우를 대비시킨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논의 방식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그는 여기서 메디치 가 군주에게 그들이 처한 입장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12년 메디치 가가 피렌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군대 그리고 비르투" 덕분이 아니라 에스파냐 군대의 침입 때문이었다. 정세 변화로 '신군주'의 입장에 놓인 메디치 가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되 폭력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조언하는 마키아벨리. 메디치 가 군주의 입지를 세워주면서도 피렌체의 공화주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의 심중복안(心中腹案)이 아니었을까. 야만인들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하는 '영광'을 얻으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마지막 장인 제26장 역시 이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다.

신군주가 사는 방법

시대가 바뀌어도 『군주론』이 언제나 주목을 받았던 것은 통상적인 도덕률과 대비되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적 행위 윤리가 이 책 속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그가 던지고 있는 문제는, "과연 신군주라면 자신의 정권과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신민과 이웃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제15장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써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와는 다르므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행해져야 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고집하는 군주는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선하게만 행동하려는 사람은 전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패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권력을 보존코자 하는 군주는 비록 선하지 않은 방법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현실 인식의 원리, 즉 현실주의가 이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된 곳을 찾기는 힘들다. 그는 여기서 현실과 당위를 엄격히 구분하면서, 현실 그 자체를 정치 행위와 판단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군주론』 후반부의 장들(제16장~제23장)은 르네상스 도덕론자들이 제시한 전통적인 덕성 개념을 하나하나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통해 흔히 악덕으로 간주되어 온 행위들이 정치의 장에서는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신군주의 새로운 행위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군주는 신민에 대해 가혹하게 대해야 할까 아니면 자비롭게 대해야 할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사랑을 받는 편이 좋을까?(제17장).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후자가 전통적인 도덕률이나 이른바 선군(善君)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도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주목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의 외피가 아니라 그 본질이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보통 가혹하고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취한 엄격한 조치 덕분에 로마냐는 안정과 질서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소수의 개인들이 희생되더라도 과도한 방종이 국가 전체에 초래할 더 큰 해악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비심이며, 따라서 신군주는 자신이 가혹하다는 평판에 전혀 개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1490년경의 피렌체 전경.

마찬가지로 군주는 신민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낫다. 사랑이란 신민들이 군주에게 주는 것이므로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그들이다. 인간의 변덕을 감안할 때, 신민의 사랑에 기대는 군주는 언제 자신의 기반을 잃을지 모른다. 반면 두려움 또는 경외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 군주가 신민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경외심도 불러일으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마키아벨리식의 가정이 깔려 있다. 군주의 신의란 그것이 스스로의 이익과 합치될 때 지킬 가치가 있으며, 상대방 역시 언제나 그것을 성실히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선한 방법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방법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제18장의 언명도 바로 이러한 이기적 본성론에 근거한다. 군주가 여우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가치에 표피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그 본질을 직시하여 "운명과 상황 변화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바람 부는 대로 자신의 행동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신군주에게 권고하는 처세술의 핵심이다.

『군주론』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군주론』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책 속에 압축되어 있는 마키아벨리의 주장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날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장 속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자화상이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행위 윤리란 것은 결코 그가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 모두의 행동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관찰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일 성공하고자 하는 군주라면'이라는 가정 아래 그 관찰의 결실을 권고한 것이다.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나의 이기적이고 추하기까지 한 얼굴과 대면하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군주론』은 다양한 얼굴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군주'는 현대의 정치 보스이며, 그에게 조언하는 정치 참모는 현대의 마키아벨리다. 군주가 때로는 마피아의 두목으로, 때로는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로 얼굴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하여 유사 『군주론』이 계속해서 간행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다. 왜? 아마 마키아벨리가 관찰한 인간의 행위 방식은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여우'가 아닌 척 하면서도 사실은 모두가 '여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준 냉혹한 리얼리즘의 메시지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도덕 - 또는 종교 - 이 서로 다른 가치 영역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사인(私人)으로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과연 공인(公人)으로서도 적절한 것인지를 물음으로써, 가치 판단에서 공사(公私)의 구분이 필요함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는 정치가 합리적인 계산과 통제를 필요로 하는 영역임을 가르쳐 주었다. 불확실성의 제거야말로 정치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이라는 비유는 단지 권력 쟁패의 수단과 방법이라는 뜻에서보다 오히려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하겠다.

마키아벨리의 묘비.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그에게서 부도덕하고 권력 추구의 측면만을 너무 부각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전통적 도덕론자들이 흔히 범하는 지극히 표피적인 시각이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마키아벨리의 주장 속에 담긴 바로 이러한 측면이 우리 스스로의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적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뛰어 넘는 시발점이 아니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현대에 던져 주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한 개인으로서, 때로는 한 집단으로서 스스로의 이기적 본성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자국·자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국가·민족들과 공존하고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것이 우리 자신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시시로 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안겨 줄지라도 말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마키아벨리는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공화정에 봉직했으면서도 왜 메디치가의 호의를 얻으려고 했을까?

그는 이념 과잉의 이데올로그는 아니었다. 기회주의와 정치에 대한 열정 사이의 균형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2.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이라면서 그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과연 적절한 판단일까?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국익이었지 개인의 영달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군주란 곧 국가를 의미했다. 공사의 윤리를 구별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3. 『군주론』이 지닌 시대적 한계는 어떤 것일까?

근대 국가의 틀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의 몫이다.

 

 

 

 

 

줄거리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이책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악마'라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비난은 르네상스시대를 겇여 근대에 이르러서도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마키아벨리즘','마키아벨리스트'등과 같은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낼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확대되고 재생산되었다. 그렇게 비난과 저주에도 마키아벨리가 다시 평가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누구도 하지 못했던 진실을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변하지 않으며, 지배를 당하게 되며 강력한 리더에게 휘말리게 된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강력한 리더쉽에 옳은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느낀 점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이라는 문구가 나를 이끌었다.

지금 시점에서 늘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까...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던 중이였다.

군주론이라 하면 왠지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겁이 났던 제목이였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내 자신이 확고한 믿음과 절실함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냉엄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한 뒤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라는 현실론이야말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수많은 비난과 조롱에도 인류의 고전으롤 살아남는 이유가 아닐까 ...

  

 

실천할 항목

 

*무력을 갖추지 못한 군주는 경멸받는다-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근심하지, 남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완벽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 속에서 파멸하기 싶다-선한 의지를 갖되 악을 이해하고 활용하라.

*개인적 윤리와 리더의 덕목은 구분돼야 한다.

*썩은 사과 하나가 조직 전체를 오염시킨다.

*관대함만큼 군주를 빨리 파멸시키는 것도 없다.

*원칙 없는 선행은 불만의 원천이다.

*헤픈 칭찬은 칭찬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지배하지 않으면 남이 지배한다.

 

 

권할 문구

 

*리더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밖에는 보지 않는다.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또한 노력을 통하여 운명이 부여한 가능성을 실현하겠다는 태도가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는 현실적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