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에 관하여

[스크랩] 미일 '밀약'과 한미동맹 (上)

루지에나 2010. 8. 22. 21:49

[미일 '밀약'과 한미동맹]

 

"주한·주일 미군 이동에 '사전협의'란 없다"

<상> 정치적 수사에 그친 조항

지난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일 양국이 합의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진구
도서출판 '전략과 문화' 대표가 외부위원회의 검토 보고서와 그간 한국과 미국이 공개한 외교문서를 분석해 미일간의 '밀약'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기고를 보내왔다.

조진구 대표는 세 편의 글을 통해 미일 밀약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일본
도쿄대에서 1960년대 한미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가 60년대의 추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 4월 20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주일미군 기지의 현내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EPA=연합뉴스

2010년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1월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일본과 미국 사이에 합의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공표했다.

도쿄대학의 기타오카 신이치 교수를 좌장으로 하는 유식자위원회(有識者委員會)는 저명한 정치학자 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국과 오키나와에서의 자료 조사 등을 거쳐 총 108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오카다 가쓰야 외상에게 전달했다.

이 위원회가 조사한 밀약 문제는 (1)유사 시 핵무기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 (2)한반도 유사시의 미일 간의 사전협의, (3)오키나와 반환 후의 유사시 핵 재반입, (4)오키나와 반환과 원상회복 보상비 부담 등 네 가지였다. 여기서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 보고서의 내용을 검토한 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1960년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문제가 한미 간의 외교현안으로 부상했을 때 한국 내부에서, 그리고 한미관계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해 어떠한 논의가 있었는지 살펴본 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함의를 주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미일 간의 미공개 <조선의사록>

보고서에서 한국 관련 부분은 제3장(47-56쪽)에 정리되어 있는데, 공개되지 않은 미일 간의 <의사록(Minute)>(일본에서는 <조선의사록>이라 부름)에 의해 한반도 유사시 유엔군의 지휘 하에 있는 주일미군이 일본 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주일미군 기지를 이용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할 요소가 많았던 불평등한 것이었다. 일본 국내에서 내란이 발생했을 때 주일미군을 동원하여 내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며, 극동에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동의 없이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1월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되면서 전자는 조약에서 삭제되었다. 후자와 관련해서 미일 양국은 기시 총리와 허터 국무장관 사이의 교환공문을 통해 '사전협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르면 유엔군의 지휘를 받는 주일미군이라 하더라도 일본으로부터 전투작전을 행하는 경우 일본 정부와의 사전협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합중국 군대의 일본국에의 배치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 동 군대의 장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 및 일본국으로부터 수행되는 전투작전행동(전기 조약 제5조의 규정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것을 제외한다)을 위한 기지로서의 일본 국내의 시설 및 구역의 사용은 일본국 정부와의 사전협의의 주제로 한다.

Major changes in the deployment into Japan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major changes in their equipment, and the use of facilities and areas in Japan as bases for military combat operations to be undertaken from Japan other than those conducted under Article V of the said Treaty, shall be the subjects of prior consultation with the Government of Japan.


이것은 장래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던 1951년 9월의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1960년 1월 6일 후지야마 외상은 맥아더 주일대사(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조카)에게 한국에 있는 유엔군이 공격을 받는 긴급사태 발생 시의 예외적인 조치로서 유엔군이 즉각적으로 반격할 수 있도록 "유엔통일사령부 하에 있는 주일미군에 의해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전투작전행동을 위해 일본의 시설·구역이 사용될 수 있다(may be used)"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보고서 제3장을 집필한 하루나 미키오(春名幹男) 나고야대학 교수는 지난한 교섭을 거쳐 사전협의를 이끌어낸 일본 측이 기시-허터 교환공문의 국내적 효과를 약화시키는 <조선의사록>은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협의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의 긴급조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미국 측의 주장에 더해 한반도 정세가 "일본 자신의 안전에 미치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합의하게 되었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미일 간의 교섭 과정에서 <조선의사록> 초안은 1959년 11월 24일 및 11월 28일자, 12월 14일, 15일 및 18일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합의된 1960년 1월 6일자(내용은 같지만 다른 2개의 복사본) 등 7통이 발견되었지만,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사전협의 없는 출격을 인정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교섭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측에 변화가 없었다.

안보조약의 개정은 '화장 고치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미 신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등장했던 기시 총리에게는 정치적인 의미가 적지 않았다. 조약의 개정을 통해 일본이 미국에게 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 방위를 약속한다는 의무의 상호성을 높임으로써 일본 국민들도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신 조약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전협의(prior consultation)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밀약

안보조약 개정 시 일본 측은 좌파와 야당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의 반입과 극동 유사시의 전투작전행동을 사전협의의 대상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주일미군 장비의 '중요한 변경'이나 '전투작전행동' 또는 '협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싸고 미일 사이에 명백한 합의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과의 조약 개정 교섭을 시작하기 직전인 1958년 9월 9일 맥아더 대사는 미 국방부와 군부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본과의 사전협의는 '협의(joint consultation)'와 '합의(agreement)'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협의(joint consultation)'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협의(consultation)'가 '동의(consent)'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국제법상의 거부권과 같은 효력을 갖지만, 일본 정부도 그런 거부권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전협의에서 일본이 반대해도 사실상 효력이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1월 19일 기시-아이젠하워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사가 없음을 보장"했다*. 기시 총리도 1960년 2월 26일 중의원에서 연방의회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 측이 '노'라고 말할 경우 미국이 일본의 의사표시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는 의미의 거부할 권리가 일본에게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적어도 일본 정부는 미국의 일본 내 기지 사용에 대해 일정한 발언권을 확보함으로써 형식적으로라도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坂元一哉, 『日米同盟の絆: 安保条約と相互性の模索』有斐閣, 2000, 제5장)

*The President assured him tha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has no intention of acting in a manner contrary to the wish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with respect to the matters involving prior consultation under the treaty.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조약의 개정을 통해 사전협의를 약속하고, 사전협의에서 표명된 일본 정부의 의사에 반해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을 대통령이 약속한 이상 일본 내의 기지 사용은 크게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핵무기의 일본에의 반입이 불가능해져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크게 훼손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가 되었던 것이 당시 여전히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의 기지의 자유로운 이용이었으며, 핵무기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을 사전협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미일간의 '밀약'이었던 것이다. 핵무기 탑재 함선의 기항은 '장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전협의의 대상이지만, 일본 정부가 사실상 사전협의 없는 기항을 묵인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보고서 제2장 참조)

실제로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본 내의 미군기지는 전투작전만이 아니라 후방지원과 장비 수리, 정보교육 훈련기지로서는 물론 장병들의 휴양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의 가네다 기지는 3,750미터의 활주로를 보유하고 있어 3분마다 한 번꼴로 미군기가 이착륙할 정도로 중요했으며, 1966년 4월 6일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 군사위원장이 지적한 대로 요코스카와 사세보가 없었더라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과의 사전협의 없이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해 전투작전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미일 간의 사전협의가 유명무실한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한미관계에 있어서의 사전협의는 정치적 수사

한편 한미관계를 보면 조약상의 의미는 아니지만 '사전협의'라는 말은 여러 번 등장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를 할 때 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해줄 것을 미국 측에 요구했었으며, 국회에서도 논의되기도 했다.

(가)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 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상당한 수의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To insure the security of Korea, no significant reductions in U. S. troop strength will be made without prior consultation with the ROK government.

(나)미국의 병력의 감소 또는 증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지 UN군사령관과 여기에 대해서는 세밀히 제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가 나가고 한다는 것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장비의 출입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여하한 규정된 사실이 없고 우리로 보아서는 미국이 대한민국 방위를 위해서 되도록 많은 장비를 대한민국에 가져오는 것을 희망하고 또 이것이 우리 국방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지만 (중략) 이 장비까지도 가지고 들어오는 출입국문제에 관해서 미국과 꼭 어떠한 협정이 필요한가 안한가 하는 것은 추후에 다시 연구해서 다시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는 1966년 1월 18일 비치 주한미군사령관이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이다. 베트남 전쟁이 악화되면서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는데, 비치 사령관은 서한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할 파병 대가를 제시하면서 한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significant라는 말이 '의미 있는' 혹은 '상당한' 등으로 해석되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나)는 1966년 9월 5일 개최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황인원 민중당 의원의 질문에 대한 김성은 국방장관의 답변 중 일부다. 1966년 8월 31일 미 민주당 정책위원회는 유럽 주둔 미군의 감축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상원에 제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러셀 상원 군사위원장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이 조선일보 9월 3일자에 실리면서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의 입출입 문제가 국방위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황인원 의원은 한국 정부가 모르는 사이에 1년 전부터 병력 교대를 통해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주한미군의 '철수, 이동, 교대 및 장비의 교체'에 관해 한미 양국 정부가 사전협의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이를 위해 대미교섭에 나설 용의가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김성은 장관은 주한미군의 병력에 대해서 주한미군사령관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으나 장비의 경우 어떠한 규정도 없어 무엇이 필요한지 검토하여 추후에 보고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의 현황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으며, 교대를 이유로 한국을 떠난 미군의 대체 병력이 오지 않아 주한미군은 기지의 경비를 민간회사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군기지 주변의 경찰서를 통해 출입 현황을 파악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1966년 9월 주한미군의 주력을 이루는 미8군 병력은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1월까지의 1년 동안의 평균(41,658명)을 훨씬 밑도는 최저수준(38,711명)을 기록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한국 정부와의 사전협의나 동의를 얻어 주한미군을 철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닉슨 정권 때에는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1969년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북한의 도발행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미국 내 여론에 관계없이 "한국으로부터의 미군의 철수는 예외로 취급할 생각"이라고 박정희에게 말했지만, 끝내 미국은 제7사단을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제2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한국외교문서, 韓·美 頂上間 單獨會談錄 및 兩國 閣僚 會議錄, 『박정희대통령 미국방문, 1969.8.20-25 전3권』 V.1 기본문서철)

닉슨 대통령의 발언은 1969년 4월 15일 미군 정찰기가 북한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를 수행해 샌프란시스코에 온 포터 주한미국대사에게 닉슨은 조만간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훈령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이미 워싱턴에서는 닉슨의 지시에 따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주한미군 병력수준을 포함한 대한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주한미군을 감축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감축 보류는 애초부터 미국의 선택지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주한미군 일방적 철수를 막아라" 선봉에 선 차지철

<중>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미친 영향

지난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일 양국이 합의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진구
도서출판 '전략과 문화' 대표가 외부위원회의 검토 보고서와 그간 한국과 미국이 공개한 외교문서를 분석해 미일간의 '밀약'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기고를 보내왔다.

조진구 대표는 세 편의 글을 통해 미일 밀약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일본
도쿄대 60년대 한미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 60년대의 추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상편 "주한·주일 미군 이동에 '사전협의'란 없다" 바로가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

1960년대 한미관계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국은 1964년 가을에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파견한데 이어 1965년 3월 말에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 도착해 있었다. 한국은 남베트남과 동맹관계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조약상의 의무도 없었으며, 한국군 장병에 대해 미국이 하루 1달러(이등병)에서 6.5달러(대령)의 수당을 지급하면서 훗날 미군의 용병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반면, 정치, 경제, 안보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버팀목이 되었던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전후 경제재건을 이루었듯이 10억 달러가 훨씬 넘었던 한국의 베트남 전쟁 특수는 196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축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한국군 파병은 주한미군의 베트남 전용 막는 수단

미군기지 방호라는 제한된 임무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1965년 3월 미국은 2개 대대의 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켰는데, 이것은 베트남 전쟁을 그들의 전쟁이 아닌 미국의 전쟁으로 바꿔놓은 서곡이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 내에서 한국군의 파병문제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중국이 개입해 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될 경우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가에게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할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으며,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도 의견을 묻는 전문을 보냈다. 1965년 3월 30일자 회신 전문에서 브라운 대사는 막바지에 달한 한일협정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파병을 요청할) 적당한 시기가 아니"지만 한일협정 비준 뒤 미국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의 파병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의견을 워싱턴에 보냈다.

한국의 전투부대 파병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제공하는 유인책으로 브라운 대사가 생각했던 것은 주한미군의 계속주둔 보장, 한미상호방위조약의 NATO조약 수준으로의 개정, 대체부대 창설 비용의 제공, 파병부대에 대한 수당과 군수지원, 군사원조이관 중지, 군사원조의 증대, 한국산 제품의 역외조달 확대 등 매우 다양했다.

한미 양국 정부 사이에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5월 5일 남베트남의 콰트 수상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서한을 정일권 총리에게 보낸 이후였다. 1주일 후인 5월 12일 정일권 총리는 브라운 대사와 하우즈 주한미군사령관을 불러 남베트남 정부의 파병 요청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한국 정부가 국회 지도자들과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정 총리는 국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수정, 주한미군의 계속주둔 보장, 군사원조의 증액 및 군사원조이관의 중지 등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브라운이 본국에 보고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문제는 불과 1주일 뒤로 다가온 박정희의 방미 시의 한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조지 볼 국무차관은 박정희와의 회담에서 전투부대의 파병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비전투부대의 파병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데 그칠 것을 존슨 대통령에 건의했지만, 러스크 국무장관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17일에 열린 회담에서 존슨은 1개 사단의 전투부대 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박정희는 파병요청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한 채 주한미군의 감축문제가 한국 국민을 불안하게 해왔다면서 주한미군의 계속주둔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요구했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어떠한 부대도 철수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다음날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박정희는 한국전쟁에서처럼 미국과 자유진영은 공산주의와 싸우겠다는 '결의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전투부대의 파병을 시사했으며, 이어 열린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이 미군과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울 각오가 돼있다는 것을 존슨 대통령이 알았으며 좋겠다"고 말해 전투부대의 파병 의사를 명확하게 표명했다.

▲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 장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 회담을 기점으로 베트남 전투병 파병을 본격 추진했다. 그것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박정희의 귀국 후 한국 신문에는 한국이 1개 사단의 파병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동의안을 심의하기 위한 임시국회가 7월 29일에 소집되었다. 그렇지만 야당이 한일협정의 비준에 반대하면서 국회는 파행을 겪었으며, 8월 13일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파병동의안은 가결되었다. 이날 김성은 국방장관은 다음가 같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전투부대의 파병을 정당화했다.

첫째, 한국의 안보는 극동안전과 직결되어 있는데, 극동의 안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세계의 결속된 집단안전보장 노력에 의해 보장되는데 파병은 우리에게 닥쳐올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필요하다.

둘째, 베트남의 정세가 악화되어 비전투부대의 지원만으로 불충분하고,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 우방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되지 못한다.

셋째, 베트남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도 한국방위와 주한미군의 병력 계속 유지 등 미국의 대한정책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다.

넷째,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의리와 우의가 매우 중요하며, 전투부대의 파병은 한국-미국-남베트남의 유대관계를 증진하고 한국의 비중을 높여 국가이익 증대에 기여한다.

다섯째, 국위를 선양하고 아시아에서의 집단 대공(對共) 방위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965년 4월 15일 브라운 대사가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 요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베트남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다른 국가들도 아직 전투부대를 보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것은 경제적인 실리 이외에도 냉전적인 국제정세 인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처럼 보인다. 1965년 9월 해병 제2여단 결단식에서 박정희가 말한 대로 베트남 전쟁은 '이웃집에 난 불'이 아니었으며, 남베트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의 안보도 기약할 수 없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또한 베트남의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주한미군의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는데, 한국군의 파병을 통해 대북방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주한미군의 감축 혹은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 1965년 3월 중순 이동원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과 함께 주한미군 1개 사단의 베트남으로의 이동문제를 언급하기도 했으며, 미 국방부는 맥나마라의 지시에 따라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병력 축소 문제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있었다.

브라운 대사와 하우즈 주한미군사령관은 주한미군의 축소는 정상회담에서의 약속위반이며 한국 국회에서 전투부대의 파병동의안이 통과되는 데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전투력과 효율의 저하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6월 15일 밴스 국방부(副)장관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이 실행에 옮겨질 때까지 주한미군의 축소를 위한 행동은 취하지 않으며, 비용절감 효과가 크지 않은 한국군 축소문제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미국 정부 내의 움직임을 한국의 지도자들이 알고 있던 것은 아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무엇을 담고 있나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져 갔다. 비전투부대를 파병할 때부터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의원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과 주한미군의 계속주둔 보장, 조속한 한미행정협정의 체결, 한-미-남베트남 3각 무역 촉진 등 세 가지를 강하게 요구했다.

특히 세 번째는 미국이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1965년 7월 10일자 전문에서 브라운 대사는 한국군의 급여인상 지원이나 군사원조이관의 중지, 한국산 제품의 조달 확대 등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을 국무부에 건의했는데, 이것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는 일본에서 조달하면서 한국에게는 '살아있는 육신(flesh and blood)'(한국군의 파병)을 요구하고 있다는 한국 내의 비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53년 10월에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조약은 전문과 본문 6개조 그리고 미합중국의 양해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에서는 조약이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잠재적 침략자'와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위하기' 위한 방위와 억제를 위한 것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제1조는 유엔헌장의 목적과 의무의 준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2조에서는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external armed attack)'에 의해 어느 한 체약국의 정치적 독립과 안전이 위협받았을 때 '언제든지 서로 협의할(consult together whenever)' 것을 약속했다.

가장 중요하고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제3조였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국방조약집 제1집』1981년, 154-157쪽) 즉,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Each Party recognizes that 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 in territories now under their respective administrative control, or hereafter recognized by one of the Parties as lawful brought under the administrative control of the other, would be dangerous to its own peace and safety and declares that it would act to meet the 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cesses.


'행정지배하에 있는 영토'라는 것은 본래는 한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이지만 조약에 의한 의무는 한국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약문의 마지막에 덧붙여져 있는 <미합중국의 양해사항>은 "어떤 체약국도 이 조약의 제3조하에서는 타방국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를 원조할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국에 의한 북한공격(북진통일)을 미국이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미국이 인정한 한국 영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해서만 조약상의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각자의 헌법적 수속에 따라' 행동한다는 문구였는데, 이것은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체약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체약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무력을 포함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행동을 '즉시(forthwith)' 취함으로써 공격받은 체약국을 원조한다는 NATO 조약 제5조와는 대조적이었다.

제4조는 미국이 한국의 영토 내와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한국이 허여하고(grant)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accept)는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5조와 제6조는 비준절차와 조약의 유효기간을 각각 정하고 있다. 제4조도 미군의 주둔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 철수에 대한 언급이 없어 미국은 한국의 동의 없이도 군대를 언제라도 철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비전투부대를 파병할 때부터 야당 의원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여당 의원조차 파병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파병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파병조건을 둘러싼 미국과의 교섭에서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국회의원들의 조약 개정 요구는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선봉에 섰던 것이 차지철 의원이었다.

차지철 의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 논의 선봉에

미국 정부로부터 전투부대의 증파를 요청받은 한국 정부는 2월 말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국회 심의과정에서의 최대 쟁점은 파병이 한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미 파병되어 있는 전투부대에 추가로 파병되는 1개 사단을 합치면 파병 규모는 군단 규모에 달했기 때문에 야당은 이것이 한국방위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파병의 공백을 메우고 주한미군의 철수(이동)를 막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그런 가운데 1966년 3월 12일 차지철 의원을 비롯한 55명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보완개정촉구에관한건의안>을 국회 외무위원회에 제출했다. 차지철 의원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과 맺은 조약에 비해 유사시 "각자의 헌법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즉각적인 공동행동을 취할 수 없게 되어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실효성이 약하다면서 미국의 자동개입을 조약상의 의무로 할 것과 함께 한국과의 합의 없이는 "일방적으로 진주나 철수가 불가능하도록" 조약을 보완 개정하도록 요구했다.

사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어떠한 조약도 헌법의 규정에 따르지 않고 자동개입을 명문화한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합의에 의해 미군의 철수를 규정한 경우도 없다. 브라운 대사는 3월 7일 이동원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1965년 5월 18일 박정희-존슨 공동성명 제5항에서 천명한 대로 미국은 강력한 군대(powerful forces)를 한국에 주둔시키고 한국의 안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수준의 한국군을 유지하는 것을 도울 것이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NATO 조약에 비해 미국의 의무가 취약하다는 비판은 사실과 다르며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2월 23일에는 방한 중인 험프리 부통령이 "휴전선상 즉 군사분계선 상에 한 사람의 미국 군인이라도 있는 한 미합중국의 전체의 그리고 일절의 힘이 한국의 안전과 방위에 메어져 있는 것(As long as there is one American soldier on the lime of the border, demarcation line, the whole and the entire power of the United Stated of America is committed to the security and defense of Korea)"이라고 말했지만, 2월 25일자 경향신문은 험프리의 '언약외교(言約外交)'는 한편에서는 마음 든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은 불안을 금할 수 없"다면서 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는 사설을 실었다. 또한 3월 5일자 동아일보도 <한미방위조약을 수정하라>는 사설을 게재하고 차지철 의원이 추진 중인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 촉구 결의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주요 신문에는 전투부대의 파병에 앞서 조약의 개정이나 보완을 요구하는 기사가 매일처럼 실렸다.

국회는 7월 8일 "한국방위문제와 한미 양국 간의 군사적 제휴 및 재한 외국군대의 지위를 결정하는 제반 조약과 협약을 정부는 재검토하여야 하며 시국 변화에 따라 현실성 있고 주권이 보전되는 내용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보완 개폐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건의안을 찬성다수로 통과시켰다.

한국 정부의 내부 검토, 외무부와 국방부 의견 엇갈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 개정을 촉구하는 국회의 건의가 행정부로 이송되면서 국방부와 외무부를 중심으로 조약의 개정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66년 10월 21일 국방부는 자체 검토 결과를 외무부에 보냈다. 국방부는 조약이 체결되고 10여년이 지나 국제정세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극동에서 공산주의의 침략 위협이 증대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조약의 개정을 강하게 주장했다.

즉, 국방부는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지체 없이 무력행사를 포함한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으로 바꾸고, 아무런 규정이 없었던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상호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약의 효력에 관해서도 '당사국 일방의 통고 후 1년이면 실효'하게 되어 있는 것을 '상호합의에 의해서만 효력은 종료'되는 것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11월 29일 외무부 구미국 미주과가 작성한 <한·미 상호 방위조약 개정에 관한 외무부의 의견>은 NATO 조약도 제11조에서 헌법의 절차에 의해서 행동하도록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합의에 의한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는 전례가 없다면서 조약의 개정은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누가, 언제 작성했는지 알 수 없는 8쪽짜리 문서가 조약의 문제점을 정리한 뒤 수정할 필요가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검토했던 것은 흥미롭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약체결 당시의 특수한 사정(이승만의 단독 북진 위협) 때문에 조약의 적용지역을 규정한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조약처럼 '영토의 보존'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 조약 제2조는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한 위협에 대해 상호 협의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소위 간접침략(subversive activities)은 협의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협의도 누가 무엇에 대해서 협의할 것인가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서 협의의 주체와 대상을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일안보조약 제4조처럼 '극동의 국제평화에 대한 위협' 혹은 한미 양국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국제정세에 대해 협의한다고 규정해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셋째, 조약 제4조가 미군의 주둔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만 그 목적과 책임한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주한미군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한국의 안보에 유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그런 우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미일안보조약 개정 시의 기시-허터 교환공문처럼 미군의 병력과 장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 등에 대해 사전협의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이 조약의 소멸시기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동맹조약의 유효기간은 특정되어 있으며, 덜 공식적인 동맹의 유효기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는 조약이 무기한 유효하며 1년 전 상대방에게 통고하면 종지시킬 수 있는데, 유효기간을 설정하고 5년마다 갱신하는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어떤 조약에도 외국군대의 철수를 막을 방법에 관한 규정은 없어 정치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한국이 지리적으로 미국과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미국이 행동한다는 것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북한이 무력침공을 할 경우 휴전선 남쪽의 미군이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주한미군의 소위 '인계철선' 역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외교문서, 『한·미간의 상호방위조약 개정을 위한 검토, 1966』)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약을 개정해 미국의 자동개입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국의 동의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감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미국에 대한 조약 개정 요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정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미일 간의 안보개정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조진구 '전략과 문화' 대표. 정치학 박사

 

<출처:http://www.pressian.com/article/author_article_list.asp?article_num=40100514155012>

출처 : 미일 '밀약'과 한미동맹 (上)
글쓴이 : 이윤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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