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록스를 살린 멀케이

루지에나 2011. 1. 5. 12:38

"제록스의 기적, 앤 멀케이 회장"


  멀케이 회장이 지난 몇 년간 이룩한 성공은 ‘제록스의 기적’이라 불린다. 7년 전, 멀케이가 CEO직무대행으로 ‘갑자기’ 경영 전면에 나설 당시 제록스는 파산 직전이었다. 2000년까지 7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부채는 170억 달러에 달했다. 주가는 63달러에서 4달러 대로 추락해 시가총액의 90%가 증발해 버렸다. 멕시코 지사의 회계부정을 놓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제록스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멀케이는 이런 제록스에 ‘잔 다르크’처럼 등장했다.

 

  당시 CEO 교체에 나선 제록스 이사회는 CEO 내정자로 경영훈련을 받아오던 임원을 탈락시키고 시장담당대표이던 멀케이를 CEO 직무대행에 선임하는 모험을 택했다. 열정과 정직함,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그녀가 주도한 프로젝트가 칼리 피오리나가 이끌던 HP에 타격을 입힌 점 등을 높이 산 것이다.

  그녀 자신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소식이었다. 멀케이는 영문과를 졸업하고 24세에 복사기 판매원으로 제록스에 입사해 16년 동안 영업 부문에서만 일해 왔다. 인사담당 임원을 거쳐 시장담당대표로 승진했지만 장래 CEO 후보로 거론되며 직원들의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 멀케이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은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CEO 직무대행에 오른 멀케이는 앞길을 비출 ‘빛’이 필요했다. 그녀는 안면도 없던 워런 버핏(Buffett)의 조언을 듣기 위해 오마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훗날 멀케이는 버핏의 투자를 이끌어 내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 은 2시간가량 멀케이의 고민을 들어주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CEO로 승진했다고 생각하세요? 절대 아닙니다. 당신은 오늘부터 전쟁터에 끌려갔다고 생각하세요.” 버핏은 조언을 이어갔다. “당국자와 은행가, 주주들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이 자신들이야말로 제록스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당신을 괴롭힐 겁니다. 당신 머릿속은 이 사람들로 꽉 차버릴 거예요. 하지만 일단 그들을 무시하세요. 그리고 당신 주위의 직원과 고객들이 회사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바를 유심히 듣는 데 최우선을 두세요.”

  버핏은 제록스에 투자하지 않았지만, 멀케이는 버핏의 조언을 실천했다. 그녀는 90일 동안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 지사를 돌며 직원과 고객의 의견을 들었다. 처음 2년 동안 그녀는 단 한 주도 주말에 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못 말릴 정도로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격을 바탕으로 주위의 임원들과 모든 정보를 공유했고, 직접 발로 뛰며 일을 성사시켰다.

 

  멀케이의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생 과정에서 채권단 은행 56개 중 2개 은행이 기한 연장에 동의하지 않자, 은행 한 곳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 일화는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멀케이).” “우리 은행은 이미 기한 연장에 동의했는걸요(은행 임원).” “그게 아니고요, 저를 위해서 다른 은행 2곳에 전화를 좀 해주세요(멀케이).” 멀케이는 결국 나머지 은행들로부터 동의를 이끌어 냈다.

  그녀는 엄청난 규모의 대량감원으로 직원들을 매몰차게 내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자기가 임원 시절 직접 기획하고 직원들을 뽑아 창설한 ‘데스크톱컴퓨터 부문’의 폐지로 시작된 구조조정은, 전체 인력의 40%를 감원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남은 직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느슨했던 조직에 활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텍사스의 한 지사에서는 판매왕에 오른 직원이 인센티브를 거절하고, 동료들이 그에게 세차 서비스를 해주는 장면도 벌어졌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인복이 많은 리더다. 이사회의 한 임원은 CEO 대행 시절 멀케이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겨 이렇게 격려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제록스의 변화를 위해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을 전부 했느냐’고 묻고,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일을 잊고 편안하게 잠드세요. 나는 그 답이 ‘예스’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던 그녀의 큰 아들은 제록스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멀케이 체제에서 제록스는 복사기 제조업체에서 종합 문서 솔루션 회사로 거듭났다. 비결은 ‘모방’을 통한 비즈니스 모델의 ‘재창조’였다. 모토로라와 GE의 6시그마를 조직에 이식했고, 솔루션 회사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룬 IBM의 노하우를 ‘복사’했다. 트렌드를 따라 복사기 제품을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속히 전환시켰다. 멀케이는 2001년 정식 CEO가 됐고, 2002년에는 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멀케이는 요즘 후계자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주인공은 멀케이와 함께 제록스의 회생을 이끈 우술라 번스(Bruns ․ 49) 사장. 엔지니어 출신 흑인 여성으로, 문제해결능력과 친화력을 고루 갖춰 차기 제록스 CEO로 유력한 것으로 점쳐진다. 멀케이와 번스는 경영과 엔지니어 부문에서 마치 자매처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제록스를 이끌고 있다. 포천은 번스가 멀케이의 뒤를 이을 경우 미국 500대 기업 중 최조로 2회 연속 여성 CEO를 배출한 회사가 된다고 보도했다. 번스도 제록스 인턴 출신으로, 어려운 가정 환경을 딛고 성공하는 등 자수성가한 여성이라는 면에서 멀케이와 공통점이 많다. 미국 기업은 스타 여성 CEO 한둘을 내세우던 시대에서, 성공한 여성이 후배 여성을 이끌어주고 키워주는 ‘여성 멘토’의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