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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B.C. 479.02.11 공자 사망

루지에나 2013. 4. 3. 13:33

B.C. 479.02.11  공자 사망

 

 

 

 

 

 

 

 

 

 


 

공자[ 孔子 ] 공구,공부자,중니

BC 551 노(魯)나라~BC 479 노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 교육철학).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공자 시대의 역사적 배경

공자가 주창한 학자적 전통은 고대의 성군(聖君)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왕조는 은(殷:BC 18~12세기)이지만 공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를 유교전통의 시원(始原)으로 잡고 있다. 공자가 유교의 문화적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와 그 문인(門人)들은 자기 자신들을 전통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나중에 중국 역사가들은 이 전통을 유가(儒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전통은 전설상의 두 성군인 요(堯)와 순(舜)이 도덕정치를 펴던 2,000년 전으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공자가 숭배했던 인물은 주공(周公:?~BC 1094)으로 주공은 '봉건적' 의례제도를 확충·완성시킨 인물로 여겨진다 (→ 봉건제). 이 의례제도는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인척관계, 새로 맺어진 계약 및 오래된 협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정교한 제도였다. 국가가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통해 국내 질서뿐 아니라 제후국들과의 연합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정치이상에 통치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 (→ 사회통제). 그 이상이란 천명에 의해 윤리적·종교적 권한을 갖춘 보편적 왕권을 확립하는 것과 법적 구속이 아닌 예의범절에 의해서 사회적 유대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는 이같은 정치이상을 실현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 평화와 번영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주공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받은 공자는 고대의 성현들로부터 배운 정치이상을 실현시킴으로써 주공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평생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정치는 곧 도덕이라는 그의 철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개념이었던 ' 천'(天)은 대의 '상제'(上帝)와 유사한 개념이다. 은대의 왕들이 자신들을 상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들의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대의 왕들에게 있어서 '천'은 훨씬 의인화된 신(神)을 의미했다. 주의 왕들은 '천명'(天命)은 늘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왕가의 후예들이 언제나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민심이 천심'(民心則天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유지하려면 필수적으로 덕을 갖추어야 했다. 주대에 인자한 도덕정치를 강조했던 사실은 수많은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은나라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고 도덕정치라는 뿌리깊은 세계관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활기넘치는 봉건적 의례제도와 주왕가의 도덕적 통치 때문에 주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771년 중앙아시아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민족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옮겨 현재의 뤄양[洛陽]으로 동진하게 되었다. 그뒤로 실권은 봉건영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주왕가의 후손들은 명목상으로 왕의 지위를 유지했고 부분적으로 상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에 이르러 봉건적인 의례제도는 근본적으로 붕괴되었고 정치적 위기로 인해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가 매우 높아졌다. 상징적 통치의 중심이었던 주의 왕들은 더이상 왕국이 완전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응책은 먼저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 휴머니즘).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정치안정과 사회질서에 기여해온 사회제도, 즉 가정·학교·향리·제후국·종주국 등을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공자는 금권과 권력이 최고라는 현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존엄성, 사회 연대, 정치질서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품과 지도자적 자질의 밑바탕이 되는 도덕심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공자와 논어

유교전통에서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 존경받는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제2세대가 편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전(口傳)과 문서로 보존된 공자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이 책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공자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논어〉가 서로 관련이 없는 대화들을 되는 대로 모아 놓은 책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공자가 일상생활에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충고를 해주는 상식적인 도덕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어〉는 여러 사람의 공동 기억을 기록한 것으로, 자신을 유생(儒生)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자에 대한 기억을 계승시키고 공자의 생활양식을 현재에도 살아 있는 전통으로 전수시켜주는 문서로서 수세기 동안 숭배해왔다. 〈논어〉 속의 대화는 생각하고 움직이는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 공자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논어〉 속의 말씀은 공자의 인품, 즉 야망·공포·환희·신념·자기발견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자를 초점으로 하는 이같은 농축된 말씀을 편찬한 목적은 논증이나 사건의 기록을 위한 것은 아니고, 독자들이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논어〉를 통해 유생들은 수세기 동안 공자와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장엄한 의식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공자의 정신사(精神史)에 대한 짧은 자서전적 기술로 가장 중요한 신상발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고,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서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爲政篇 4장)

 

제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공자의 일생은 교육이 끊임없는 자기 실현의 과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의 인물됨을 잘 표현할 수 없었을 때 공자는 자로를 이렇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너는 왜 '그분(공자)의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식사를 잊고 그러한 것을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 늙음이 닥쳐오리라는 것조차 모르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述而篇 18장)

 

공자는 그가 숭상하는 문(文)이 잘 전수되지 않고 그가 주창하는 학(學)이 잘 가르쳐지지 않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같은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배운 것을 기억해내는 능력, 끊임없는 학문연구,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 등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덕(德)이 닦아지지 아니하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아니하는 것과 정의임을 알고도 그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내 근심이다."(술이편 3장)

 

그가 제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발적인 향학열이었다. "알려고 답답해 하지 않으면 지도하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으면 일깨우지 않는다."(술이편 8장)

 

공자의 문하생들은 다른 나이, 다른 배경, 다른 나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지망생들이었다. 그들은 공자의 이상에 동참했고 점점 더 분열되는 정체(政體)에 도덕심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자의 사명의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공유했기 때문에 공자의 문하로 몰려들었다. 공자의 사명의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위험하기조차 했다. 공자 자신도 실직·향수·기아,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숭상하는 문화의 생명성과 그가 주창하는 학문적 태도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그 자신과 문하생들에게 하늘이 도와주리라고 확신시켰다. 광(匡)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졌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왕(文王:주나라의 창시자)이 돌아가버리고 나서는 그가 이룩한 문화가 나한테 전하여져 있지 않으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나같은) 뒤에 죽을 사람들이 이 문화에 관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어쩌겠느냐?"(子罕篇 5장)

 

강렬한 사명의식에 불탄 나머지 이같은 자신감을 드러낸 것을 보고 공자의 인물됨이 교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은 절대로 성현이 아니며, 자신이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뿐(公冶長篇 27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은 지식을 넓히고 자의식을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지식인도 아니고 지식의 도움없이 사회를 변모시킬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라고 솔직히 시인했다. 자신이 귀를 활짝 열어놓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중에서 선한 것을 애써 행하며, 눈으로 두루 살펴 자신이 본 것을 마음 속에 남겨놓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의 학문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지식'(술이편 27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공자는 신에게 호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선지자도, 진리를 환히 꿰뚫는 철학자도 아니었다. 단지 (仁)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자기 실현이라는 길에 나선 여행자들 가운데 다소 앞선 지점에 있는 여행자일 뿐이었다.

 

인을 설파했던 공자는 인간을 위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말했다. "늙은이들은 편안하게 하여 주고, 벗들은 신용있게 대하도록 하여 주고, 젊은이들은 따르게 하여 주는 것이다."(공야장편 25장) 도덕사회를 세우기 위한 공자의 이상은 인간조건에 대한 전체론적 사상에서 출발한다. 자연 속에서의 인간조건 같은 추상적 이론을 펼쳐나가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 이해를 사상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공자의 목표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정치와 사회 내에서 인(仁)을 배양하여 사회를 도덕적 공동체로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공동체, 즉 군자의 모임이 필수적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군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도량이 넓고 꿋꿋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소임은 중대하고 갈 길은 멀다. 인자함을 이룩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하니 또한 중대하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라야 끝나니 또한 갈 길이 멀지 아니한가?"(泰伯篇 7장)

 

군자를 사회의 도덕적 선봉으로 내세웠다고 해서 아주 다른 사회계급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 사회화). 군자의 소임은 수세기 동안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가운데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 속에 살 수 있게 한 사회제도들을 재검토하여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회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가정이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 21장에서 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옛 경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대답했다. "〈서경 書經〉에 '효도하라, 오직 효도하라, 그리고 형제에게 우애있게 하라'고 했거니와, 이것을 행하는 데에 정치하는 도리가 들어 있으니 이 역시 정치하는 것이라, 일부러 정치한다고 나서서 무엇 하겠소?" 이같은 격언은 자기수양이 사회질서의 바탕이며 사회질서는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평화의 기반이 된다는 유교적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가정 내의 윤리가 정치에 효력을 미친다는 주장은 정치는 곧 '바르게 하는 것'(政則正)이라는 유교철학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통치자는 먼저 자기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력보다는 도덕적 지도력과 모범적 가르침으로 통치하는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책임에는 백성들에게 식량과 신변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을 교육시키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법과 형벌은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사회의 조화라는 보다 높은 목표는 의례를 통해 나타난 덕치(德治)에 의해 성취된다. 의례란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공동체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례의 완전성을 보장하는 기본적 유교가치 가운데 하나가 (孝)이다. 실제로 공자는 효가 도덕의 완성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보았고, 최대의 덕목인 인(仁)도 효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가문을 늘 염두에 두도록 배운다는 것은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하는 것이고, 현대심리학을 원용하여 말하면 폐쇄된 개인의 자아를 개방된 자아로 변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효는 부모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부모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도의 목적은 부모와 자식을 모두 번영하게 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효도가 인간이 되는 데 꼭 필요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더욱이 유생들은 가정이라는 비유를 사회·국가·천하에 확대 적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황제를 천자(天子:하늘의 아들), 왕을 부왕(父王:아버지되는 왕), 지방행정관을 친관(親官:아버지·어머니 같은 관리)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이같은 가정집중적인 명명법은 그 자체가 유교의 정치이상을 잘 보여준다. 공자는 '가사를 돌보는 것'(齊家)이 그 자체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가정윤리가 단지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통해, 그리고 가정에 의해 공동의 선이 실현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공자는 인을 성취하는 과정이 "자기를 극복하는 예(禮)로 돌아가는 것"(顔淵篇 1장)이라고 정의했다. 공자는 자기 변모와 사회 참여라는 2가지 사항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충(忠:엄격)으로, 남에게는 서(恕:너그러움)로 대할 수 있었다(里仁篇 15장). 실제로 공자는 억측·장담·고집·이기심의 4가지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자한편 4장). 이렇게 볼 때 유교의 황금률이 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衛靈公篇 23장)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윤리학). 심원한 윤리적 교훈이 들어 있는 공자의 유업은 인(仁)을 얻기 위한 배움이 공동체적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하고 실제적인' 인식에 잘 나타나 있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발전시켜준다. 가까운 자기를 가지고 남의 입장에 비겨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인(仁)의 올바른 방향이라 하겠다."(옹야편 28장, 이상 〈논어〉 인용부분은 차주환역)

 

Tu Wei-ing| 李鍾麟 옮김

 

 

/네이트 백과사전

 

 

 

 

공자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하고 지위가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짧은 정치적 영광과 긴 방랑, 그리고 애제자의 죽음

공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콘휴셔스(Confucius)는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기원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72살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명(正名)에 나타난 보수주의자로서의 공자


공자라고 하면 (仁)부터 떠올리지만 공자에서 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禮)이다.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말하는 배움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 문물, 사상, 예법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러한 예는 문(文)이기도 하다. 악명 높은 양호로 오인되어 광(匡) 지방 주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이 문(文)을 말살시킬 작정이라면 살아날 수 없겠지만, 하늘이 문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주나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공자의 자의식을 엿보기 충분한 발언이다. 공자가 말한 ‘이 문’(斯文)에서 ‘문’은 주나라 문화의 총체이자 곧 예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시대상을 배경으로 되새겨보면, 당시 사회는 하극상(下剋上)의 상황, 즉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제왕을 이기려하고 그 지위를 넘보는 상황, 사실상 주나라 봉건 질서가 무너져가는 현실이었다.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것은 하극상의 주체 또는 그러한 욕망이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극기복례는 결국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통적인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가 흔들리면서 많은 이들이 본래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합당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극기복례에 관한 한 공자는 다분히 보수적인 모습을 지닌다. 공자의 정명(正名), 즉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것은 이미 정해진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유교무류(有敎無類)에 나타난 혁신가로서의 공자


공자는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그러나 공자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공자의 교육 목표는 군자(君子), 즉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일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에 따라 귀족들이 세습했다. 그러나 공자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능력과 덕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며, 여기에서 혁신가로서의 공자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공자가 창안해 낸 생각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미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통적인 주나라 신분 질서와 사회 계급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교무류로 대표되는 공자의 교육 철학과 인간관은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극기복례에서 볼 수 있는 보수성과 유교무류에서 볼 수 있는 혁신성. 변화와 혼란의 시대를 산 공자의 얼굴은 한 가지가 결코 아니다.

 

 

유교적 합리주의, 인문주의의 길을 놓은 공자

공자는 제자 자로가 조상의 영혼과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아직 능히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 답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 답했다. 공자는 사후의 삶 같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현재의 삶의 경험에 충실하면서 그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또한 제사를 올려야 마땅한 조상 이외의 다른 신에 제사 지내는 것을 꾸짖었으며, ‘귀신을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는 말라’ 말했고 괴력난신(怪力亂神),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공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탄식했지만, 인격성을 갖춘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늘을 긍정했다기보다는 애제자를 잃은 비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관심은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의 ‘문’(文)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있었으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삶 바깥의 신적(神的), 초자연적, 초월적, 신비적 영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유교를 현세적 합리주의, 유교적 합리주의, 유교적 인문주의 등으로 형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공자의 이런 태도에 있다. 공자 사상의 막대한 영향력 속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은 적어도 그 주류 사상에서는 현세주의와 인문주의의 길을 걸었다.


공자의 모습을 담은 판화. <출처: wikipedia>

 

 

이상을 추구했던 공자.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자’


공자는 실패했는가? 적어도 그의 생애만 살펴본다면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나라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뜻도 여의치 못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계승할 제자로 기대했던 안연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한나라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부침(浮沈)은 겪었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의 패자(覇者)로 자리 잡았다. 왜 그토록 공자의 생명력이 길었을까? 공자와 유교가 지닌 보수성 또는 체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 이념으로 적합했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 역대 왕조들이 공자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일리 있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공자의 생명력의 비밀은 어쩌면 그의 지독한 이상주의(理想主義)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자는 자기 당대에 ‘그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이’(知其不可而爲之者)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극상의 혼란이 팽배한 현실에서 주나라 문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삼아 추구했던 그로서는 당연히 들을 만한 얘기였을 법하다. 바로 그 지점에 공자의 생명력이 있다. 전통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애써 실현키 위해 노력할 만한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현실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이상에 매료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루기 쉽다면 그것이 과연 이상일까? 이상은 이루기 힘들 때 이상으로서의 매력과 힘을 발휘한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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