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철학
·진실, 정직, 신용이 바탕
·기업경영에 지나친 욕심은 금물
·협력적인 노사관계 강조
‘유리왕국’을 건설한 故 최태섭 한국유리공업(주) 명예회장은 평생을 유리 외길만을 걸어온 경영자이다. “경영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이 평소 소신으로 ‘청지기 경영론’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생 외제차를 타지 않고, 골프장도 거의 가지 않은 청빈한 기업가로 손꼽힌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최태섭 명예회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신앙인으로서 사업가로서 최태섭 명예회장의 사람됨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터져 모두 피난 짐을 꾸리는 난리통에 최태섭 명예회장은 빌렸던 사업자금을 갚고자 은행을 찾았다고 한다. 은행 직원은 전쟁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그는 되레 “난리통에 내가 죽어 돈을 갚지 못할지도 모르니 어서 받으라”며 구태여 돈을 갚고 영수증을 받은 후에야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또 일제시대 최태섭 명예회장이 일본 미쓰비시 물건을 중국에 내다 팔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마침 물건값이 배 이상 폭등해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미 중국인들로부터 계약금은 받은 상태였으나 계약금을 배상해준다 해도 물건을 다시 팔면 배 이상의 이득을 남길 수 있는 기회였다.
고심하던 최태섭 명예회장은 “기독교인으로서 사업가로서 한 번 한 약속을 절대 어길 수는 없다”며 엄청난 이익을 포기하고 계약한 대로 물건을 팔았다고 한다. 이 일로 중국인들은 “최태섭이라는 한국인은 참 진실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진실, 정직, 신용이라는 기업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신을 삶의 곳곳에서 실천으로 보여준 경영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최태섭 명예회장은 항상 나라를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가 1957년 이봉수, 김치복 씨 등과 함께 한국유리공업을 창립하게 된 계기도 ‘유리는 국가 재건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의 복구를 위해 필요한 막대한 물량의 유리를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유리공장의 정상적인 가동은 감격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감격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해 순조로운 공장가동을 보고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태섭 명예회장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은 우리 땅에서 나는 원료를 이용해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평소 신념대로 전량 수입에만 의존하던 판유리 생산에 착수하여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 초기의 유리 수요를 자급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1970년대에는 판유리 외에 전기, 전자, 자동차 등에 쓰이는 특수산업용 유리를 개발하며 대한전기초자, 한국특수유리, 한국복층유리 등 계열사를 잇달아 설립하였다.
1976년에는 유리기술연구소를 설립, 초박판 유리 및 뉴세라믹 등 최첨단 유리 개발로 한국 유리산업은 명실공히 세계 무대에 오른다. “국내에서는 잘 뛴다 싶어도 올림픽에 나가면 여지없이 패하고 마는 예가 적지 않다. 그러니 한 사람이 한 가지 사업만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으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최태섭 명예회장은 “유리산업 하나만은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사명감이 남달랐다.
최태섭 명예회장은 1990년대 초부터 베트남과 판유리 공장 플랜트 수출계약을 맺는 등 해외시장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북한 진출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최태섭 명예회장은 평생 ‘유리’라는 외길을 걸었던 몇 안 되는 외곬 경영인 중 한 사람으로 기업경영인이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사업을 벌여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경영이념이었다. 1990년대 초 값싼 중국산 판유리가 대거 수입됐을 때에도 최태섭 명예회장은 기술력으로 맞서며,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판유리에서 유리관, 유리솜, 유리장식 등 첨단 유리제품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현재 한국유리공업은 8개 계열사를 둔 한글라스그룹으로 회사이름이 바뀌었지만 모두 유리 관련 제품만을 생산, 판매하는 것은 최태섭 명예회장의 남다른 경영이념을 이어가고 있다.
재계에서 그의 ‘청지기 경영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영인은 기업을 소유하는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그의 경영철학은 비단 기업경영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삶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태섭 명예회장은 지난 1969년 일찍이 회사를 공개해 가족 소유 지분이 10%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또 청지기로서 노조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 나갔다.
한국유리공업 노조는 1961년에 결성돼 그룹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나 노사 간에 극단적인 마찰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최태섭 명예회장의 노조활동 불간섭이라는 원칙이 근간이 되어 모범적이고 협력적인 노사화합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깨끗하게 부를 쌓는 기업인, 버는 만큼 베풀 줄 아는 기업인이었다. 그는 사회에 봉사하는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며, 번 돈은 적절한 방법으로 사회에 환원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지켜왔다. 최태섭 명예회장이 한 번도 외제차를 타거나 골프채를 잡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재계의 얘깃거리도 아니다.
더불어 경희대학교, 한신대학교, 오산중고교, 신일중고교 등의 재단이사로 상당한 재산을 쾌척하며 활발한 교육사업도 펼쳤다. 특히 1990년 이후부터는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 이사장을 맡아 국내외 굶주리는 이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투명한 아름다움의 상징인 유리, 그 유리처럼 투명하고 진실된 경영인이었던 최태섭 명예회장. 사랑밖에 빚진 게 없다던 그는 1998년 작고했지만 재계의 영원한 청지기로 후배 경영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1957년에 한국유리 인천공장 설립과 함께 시작된 한국유리공업(현 한글라스)은 1989년 미래지향적인 회사로 키우기 위해 경영이념을 재정립하고 사명을 한글라스로 바꾸었다. 1957년 설립된 한국유리공업 인천공장은 우리나라 원료와 기술로 만든 최초의 판유리 생산공장으로 우리나라 유리산업의 메카가 되었다. 한글라스는 한국유리공업, 한국가공유리, 한국거울공업, 한국세큐리트, 한국특수유리, 한국조명유리, 한국하니소, 한국BST 등 8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는 국내 최대의 유리 생산 그룹이다. 최근 글로벌 마켓을 무대로 경쟁력을 강화해온 한글라스는 2001년 7월에는 프랑스의 쌍고방그룹과 공동으로 중국 Nanjing Saint-Gobain HanGlas의 지분 74%를 인수하여 중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 부산 공장 무늬유리의 설비 이전과 함께 고품질의 플로트 유리 생산을 추진하는 등 해외시장 진출을 향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또한 중국 영성부창규질재료유한공사의 지분 100%를 인수하고 정사공장을 성공적으로 완공, 최근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 특수경질유리시장 진출을 위해 전자레인지용 트레이(Tray)와 내열용 식기(Tableware) 등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 영신유리의 지분을 100% 취득하였다. 이밖에도 수년 간의 판로 개척을 통해 일본 현지에 상당한 양의 판유리를 수출하면서 일본 시장 진출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2004년 한글라스는 유리섬유의 안정적인 생산을 위하여 충남 당진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유리섬유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샌드위치 판넬 심재를 비롯한 각종 건축물 단열재부터 공업용 단열재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한글라스는 국내시장을 넘어 세계시장 진출을 목표로 신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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