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한국을 빛낸 100인들의 위인들>-해설 및 노래 듣기

루지에나 2015. 8. 1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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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인들의 위인들>

ㅇ 단군 : 우리나라의 시조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

→ 단군왕검으로도 불림.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임. <삼국유사>에 환웅이 웅녀와 결혼, 그 아들이 단군이라는 기록이 있음.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건국하여 약2000년 간 나라를 다스림.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임.

ㅇ 동명왕 : 고구려의 시조.

→ 재위 기간은 B. C. 37~B. C. 19이름은 고주몽 이며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 될 때까지 건국 신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이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주몽은 졸본부여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B. C.37년에 고구려를 세운 다음 임금이 되었다. 그는 송랑국·행인국 등 부근 나라를 개척하고 나중에는 북옥저까지 정복하여 점차 큰 나라의 토대를 쌓았다.

ㅇ 온조왕 :백제의 시조.

→ 재위 기간은 A.D.(기원 후) 18년에서 A.D.28년까지임.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셋째 아들. 주몽이 유리 왕자를 태자로 삼자, 온조와 비류 왕자는 부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강 유역까지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고, 온조는 위례에 도읍을 정했다.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백제로 정했다. 미출홀은 모든 조건이 백성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아 얼마 후 이곳 백성들도 백제에 합쳐졌다. 온조왕은 낙랑·마한과 싸워 국토를 넓히고 아들 다루를 태자로 정했다.

ㅇ 박혁거세 : 신라의 첫 임금.

→ 박씨의 시조. 재위 기간은 B. C. 57년에서 A. D.4년까지임. 전설에 의하면 촌장 소벌도리가 경주 지방 계림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그곳에는 이상스럽게도 큰 알이 놓여 있었다. 그 박처럼 생긴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소식을 듣고,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몰려왔다. 여섯 촌장은 우선 이 아이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박씨라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지었다. 뒤에 혁거세를 임금으로 받드니, 그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이다.

ㅇ 광개토대왕 : 고구려의 대 정복왕.

→ 19대 임금으로 호태왕 또는 영락왕이라고 한다. 재위 기간은 391년에서 413년까지임. 서른 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넓힌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임금이다. 지금 만주 집안현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능과 비는 왕의 빛나는 업즉을 길이 전해주고 있다.

ㅇ 이사부 : 신라의 장수

→ 일명 태종. 성은 김씨로서 내물왕의 4대손이다. 562년에 반란을 일으킨 가야에 출정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소백산맥 동쪽에 신라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ㅇ 백결 : 신라의 탄금가.

→ 본명은 전하지 않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살았는데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군데나 기워 입었기 때문에 백결 선생이라고 불리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이웃집에서는 모두 떡방아 소리가 들리는데 백결선생의 집에는 먹을 식량도 없었다. 그것을 그의 아내가 한탄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위로 하였다고 전한다.

ㅇ 의자왕 : 백제의 제31대 왕.

→ 의자왕은 휘 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라 일컬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간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 계백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이 나 ·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ㅇ 계백 :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백제의 마지막 장수.

→ 이름은 승. 처음에는 달솔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660년(의자왕 20년)에 장군이 된 무장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나라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허영에 빠져 나라가 어지러울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 5만 명이 쳐들어오자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계백은 용감하게 싸웠다. 장군은 황산벌에서 나·당 연합군을 네 차례나 이겼으나 많은 수를 당하지 못하고 신라군에게 패하여 모두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계백은 싸움터에 나감에 있어, 백제는 이미 국력이 기울어져 나·당 연합군ㅇ르 당해내지 못하고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계백 장군은 백제가 망한 뒤에 장차 가족들이 적군의 종이 되어 참혹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아내와 아들 딸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싸움터로 떠났다. 성충, 홍수, 계백 이 세 사람을 백제의 3충신이라 한다.

ㅇ 관창 : 신라의 무열왕 때의 화랑.

→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널리 사람들과 교제하였으며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백제를 칠 때에 부장이 되었다.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군과 싸운 끝에 생포되었으나 계백 장군은 관창의 용맹함에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 뒤 백제군과 싸우다가 관창이 다시 생포되자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말꼬리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신라군은 어린 관창의 죽음에 크게 자극을 받아 백제군을 대패시켰다.

ㅇ 김유신 : 삼국 통일의 명장.

→ 김유신은 가야 왕의 후손으로 신라의 만노군 태수였던 김서현과 만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열심히 닦아 열 다섯 살에 화랑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만명 부인은 그가 술집 여자인 천관을 찾아다니는 것을 알고 꾸짖었다. 김유신은 어머니에게 다시는 안 갈 것을 서약했다. 어느 날, 김유신을 태운 말이 무심코 늘 다니던 술집으로 간 것을 깨닫고, 그 말의 목을 쳤다. 그는 이일이 있고 난 뒤 크게 결심을 하고 삼국통일을 이루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길러 나갔다. 김유신이 죽은 후, 그의 유해는 금산원에 장사 지냈고 835년 흥무대왕에 추존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에서 제사 지냈다.

ㅇ 문무왕 : 신라의 제 30대 임금. 통일 신라를 이룩한 임금.

→ 재위기간 661년~681년. 태종 무열왕의 큰 아들로 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임금이 된 후 백제의 남은 군사를 소탕하였고 668년에는 당나라와 병합하여 고구려를 멸망 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물러가지를 않고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두어 계속 통치하려고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군과 싸워 당나라군을 북으로 쫓아내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ㅇ 원효대사 : 신라 문무왕 무렵의 고승.

→ 설총의 아버지. 원효는 중이 된 후의 법호이고 그의 어릴 때의 이름은 서당이었다. 서당은 처음에는 화랑이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다가 646년 황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배를 타러 당주계로 가다가 캄캄한 밤에 빈집으로 알고 무덤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원효는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자기가 달게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 속에 담긴 빗물이었음을 알고 깨달은 바 있어 그대로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분황사에 있으면서 원효종을 제창하여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그 뒤에 요석공주를 만나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이었다. 부처의 계율을 어긴 원효는 스스로 절을 떠나 이름마저 소성거사로 바꾸었다.

ㅇ 혜초 :신라의 고승

→ 혜초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떠나 절에서 공부를 하다가 열 살 때 당나라로 건너가서 신라원에 공부를 하였다. 그 뒤 그곳을 나와 당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금강지라는 인도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 순례를 마치고 인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써서 남겼는데 그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ㅇ 장보고 : 통일신라 시대의 바다의 영웅.

→ 궁복, 궁파라고도 부름. 완도에 성을 쌓아 청해진을 설치하고 수병을 훈련하여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학하였음. 그 뒤 중국, 일본과의 무역을 크게 일으켰음.

ㅇ 대조영 : 발해의 시조.

→ 재위 668~719년. 왕호는 고왕. 고구려가 망한 뒤 남은 무리를 이끌고 천물령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음. 699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동모산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이라 하였음. 713년 국호를 ‘발해’라 고치고, 고구려의 옛땅을 거의 회복, 해동성국을 이룩했음.

ㅇ 강감찬 : 고려 초기의 명장, 문장가.

→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으며, 하공진에게 적을 설득시켜 물러가게 함. 1018년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왔을 때 일흔 살의 많은 나이로 적군을 물리치고,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구주에서 섬멸시켰는데, 이것을 구주 대첩이라고 함. 그 후 거란이 고려를 넘보는 일은 없게 되었다고 함.저서로 <구선집>등이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음.

ㅇ 서희 : 고려 성종 때의 외교가.

→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음. 993년 거란의 침입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 설득하여 거란군을 철수시켰음. 994년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모두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에 여섯 개의 성 (강동 6성)을 쌓는 등, 지금의 평안 북고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확보했음.

ㅇ 정중부 : 고려 말기의 무신.

→무신 천대에 불만이 쌓여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였음. 의종을 폐위시키고, 의종의 동생인 호를 새 왕으로 세우고 정권을 잡았음. 이를 ‘무신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이라고 함. 무신 정치가 시작되자 문화의 암흑 시대로 들어갔음.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했음.

ㅇ 최무선 :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장군, 발명가.

→1376(우왕 2년) 원나라 이원에게 화약 제조법을 배우고, 이듬해 화통도감을 설치, 화약, 화통 등을 제조했음. 1380년 왜구가 침입하자 진포에서 화통, 화포 등으로 전멸시킴. 저서로는<화약 수련법>,<화포법>등이 있음.

ㅇ 김부식 : 고려의 학자, 문신.

→ 자는 입지, 호는 뇌천. 1134년 묘청이 왕을 설득 시켜 서울을 서경으로 옮기려고 하자, 적극 반대하여 중지 시켰음. 이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경으로 쳐들어왔음. 김부식은 총사령관이 되어 난을 평정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묘청의 난’임. 114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인 <삼국사기>50권의 편찬을 끝마쳤음. 이듬해 의종이 즉위하자 <인종실록>의 편찬을 지도했음. 저서로 <삼국사기>,<김문열공집>(20권),<봉사어록>등이 있음.

ㅇ 지눌 : 고려의 중.

→호는 목우자. 보조 국사라고도 함. 조계종의 시조임.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고 설파하며 적극 현실에 참여했음. 선종과 교종을 통합, 불교계의 기풍을 확립했음. 저서로 <진심적설>,<수심결>등이 전함.

ㅇ 의 천 : 고려의 중.

→ 고려 천태종의 시조. 이름은 후, 자는 의천. 대각 국사라고도 함.<속대장경>을 완성하였음. 숙종 때 화폐 제조를 건의, 경제 발달에도 이바지 함. 교선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만들어 선종의 종파를 통일,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사상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함. 저서 <해동유본견행록>,<대각국사문집>,<석원사림>등이 있음.

ㅇ 이종무 :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 본관 장수. 시호 양후.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고 1397년(태조 6) 옹진만호 때 왜구가 침입,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이듬해 좌명공신 4등으로 통원군에 봉해졌다. 삼군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대마도를 정벌함.

ㅇ 정몽주 : 고려 말기의 학자, 충신.

→ 호는 포은. 유교를 깊이 연구해 길재, 이색과 함께 고려 3은 이라 일컬어짐. 이성계와 힘을 모아 토지 제도를 고쳤음. 1388년 우왕의 랴오둥 정벌 전쟁에 반대,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뒤의 태종)이 찾아와 이성계 편이 되어 달라는 시조를 지어 그의 뜻을 묻자, <단심가>를 지어 고령[ 바치는 충성심을 표현해 보였음.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죽임을 당했음.

ㅇ 문익점 : 고려 말기의 학자, 문신.

→ 처음은 익첨, 호는 삼우당. 1363년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들어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에서 가꾸었음. 뒷날 우리나라 의복과 경제 생활에 크게 이바지함.

ㅇ 최충 : 고려 초기의 문신, 학자.

→호는 선재, 월포. 1013년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37년 <현종실록>편찬에 참여했음. 1047(문종 1년)법률 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음.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해동 공자’라 불리었음.

ㅇ 일연 : 고려 말기의 중, 학자.

→ 호는 목암. 뛰어난 중인 동시에 대학자이며 대문학가였음. 100여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지어냈으나, 그 중<삼국유사>만 오늘날까지 전해짐. <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 고대의 설화와 시기들이 실려 있어, 우리의 고대사 및 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음.

ㅇ 최영 : 고려 말기의 장군.

→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고, 오직 나라를 지키는 일에 힘썼음. 랴오둥 정벌을 주장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 이성계에게 잡혀 개경으로 압송되었다가 사형당함.

ㅇ 황희 : 고려 말기,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 고려 무왕때 지방 관리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시골로 내려가 살았음. 백성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선 왕조 때에도 벼슬을 지냈음. 정치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품으로 이름을 떨쳤음. 예조, 이조, 병조, 호조 등 6조의 판서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음. 농사짓는 법을 개량, 씨앗을 농민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을 막기 위한 방비책에 힘썼음. 인권을 존중하고 평등사상을 내세워 덕망이 높았음. 오랫동안 벼슬 생활을 하였으나 청빈하여 무척 가난하였다고 함.

ㅇ 맹사성 :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 이조 초기의 명상. 자는 성지. 호는 고불. 온양사람으로, 세종 때에 우의정·좌의정을 재냈고,<태종 실록>을 편찬하였음.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함.

ㅇ 장영실 :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 1434년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 완성. 1437년 해시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음.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는 등 과학 발전에 공이 컸음. 발명의 날은 장영실의 측우기 발명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임.

ㅇ 신숙주 : 조선 세조 때의 학자, 문인.

→ 호는 보한재. 집현전에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음.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 세조의 왕의 찬탈을 도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적극 보좌했음.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 1457년 금성 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단종에게 스스로 죽을 것을 명하게 했음.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써 6대 왕을 보필한 공로가 적지 않으나,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을 도운 것으로 인해 후세의 비난을 받음.<국조보감>,<세조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 하였고, 일본과 여신의 지도를 만들었음. 저서로 <해동제국기>,<보한재집>등이 있음.

ㅇ 한명회 : 조선 전기의 문신. 

→ 이조 세조 때의 공신. 호는 구정. 청주 사람. 수양 대군을 도와 김 종서 등 고명 대신을 차례로 죽이고, 단종을 몰아 내는데 크게 획책 사육신등의 처형 후, 이조판서를, 뒤에 영의정을 지냈음, 시호는 충성.

ㅇ 이율곡 :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 호는 율곡. 신사임당의 아들.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유학계의 대학자임. 이황의 ‘이기 이원론’에 대립하여 ‘이기 일원론’을 주장하여 기호학파를 이루었음. 여러 벼슬을 지냈지만, 그 중에서도 대사간의 직책을 아홉 번이나 맡아 왕이 올바른 일을 하도록 힘썼으며, 특히 국력이 약한 것을 걱정하여 10만 군대양성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음. 백성들이 자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향약’이라는 자치 조직의 규칙을 마련했으며, 이 ‘항약’ 운동을 크게 일으켰음. 저서로 <격몽요결>,<시무육조>,<만언봉사>,<성학집요>,<동호문답>등이 있음.

ㅇ 이퇴계 : 주선 중기의 학자, 문신.

→이름은 황 호는 퇴계. 주자학의 대가였으며, ‘이기 이원론’을 주장했음. 시도 잘 지어 <도산 십이곡>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겼음. 도산 서원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병중에도 성심껏 지도했다고 함. 대표적 저서로 <성학십도>, <주자서절요>,<퇴계집>등이 있음.

ㅇ 신사임당 : 조선 중기의 여류 문인, 서화가.

→호는 사임당 또는 임사재. 이이(율곡)의 어머니, 산수, 포도, 풀, 곤충 등을 자 그려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화가라는 평을 받고 있음. 어진 어머니인 동시에 착한 아내의 본보기가 되었음. 그림 <자리도>,<산수도>,<초충도>등과 한시 <사친>등이 있음.

ㅇ 곽재우 : 임진왜란 때의 의병 대장.

→ 호는 망우당.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음. 그 때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 장군’이라고도 불렸음.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함.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끝까지 지켰음. 그 후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감.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망우정’이란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냄. 저서 <망우당집>이 있음.

ㅇ 김시민 : 조선 중기의 무신

→ 자는 면오. 1592년 임진왜란 때 고성, 진해 등에서 왜군을 무찔러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음. 이해 10월 적의 대군의 진주성을 포위하자, 3800명의 군사로 7일간의 공방전 끝에 3만여 명의 왜적을 부상 또는 죽게 하여 물리쳤으며, 자신의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음.

ㅇ 이순신 : 임진왜란 때의 장군.

→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의 함선을 무찌르고 남해안 일대 바다에서 세력을 장악하였음.1597년 그의 승진을 시기한 원균의 모함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정탁의 변호로 풀려 나와 백의 종군하였음. 정유재란에서 원균이 참패하자, 3도 수도 통제사로 임명되어 12척의 배로 적선 133척과 대결하여 명량싸움에서 적의 대군을 격파했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일본군을 노량 앞 바다에서 섬멸시키고, 왼편 가슴에 적의 유탄을 맞고 쉰 네 살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저서<난중일기>와 시 20여 수를 남겼음.

『-사육신-

ㅇ 성삼문 : 조선 초기의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집현전 학사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했으며, 음운을 공부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랴오둥 반도에 여러 차례 왕래하는 등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움,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성승, 박팽년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했으며, 단종에 대한 절개를 굽히지 않아 극형에 처해졌음. 자기의 지조를 읊은 시조 2수가 전함. 저서 <성근보집>이 있음.

ㅇ 박팽년 : 조선 세종 때의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취금헌. 세종 때 집현전의 학자로 활약해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경학, 문장, 필법등이 뛰어났음.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했음. 그의 재능을 아껴 세조가 마음을 돌릴 것을 권했으나 거절하여 처형되었음.

ㅇ 이 개 : 조선 전기의 학자, 사육신의 한사람.

→ 본관 한산. 자 청보·백고. 호 백옥헌. 시호 의열, 뒤에 충간으로 개시.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고, 1456년(세조 2) 직제학 이 되고, 이해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시문과 글씨에 능했음. 

ㅇ 하위지 :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사람.

→본관 진주. 자 천장·중장. 호 단계·연풍. 시호 충렬. 집현전 교리로서 상정에 참여. 침착  ·과묵한 청백리로, 측근에서 세조를 보필하는 동안 국록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따로 저장해 두었다. 1466년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 체포되어 친국 끝에 동료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졌다. 뛰어난 문장가였음. 

ㅇ 유응부 :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사람.

→ 본관 기계. 자 신지·선장. 호 벽량. 시호 충목. 첨지중추원사·평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중추원동지사로 정2품에 올랐다.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재상으로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였고 숙종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시조 3수가 전해진다. 

ㅇ 유성원 :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사람.

→ 본관 문화. 자 태초. 호 낭간. 시호 절의·충경.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랑이 되어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문종이 즉위하자 대교 등을 지내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의 협박에 정난공신을 녹훈하는 교서를 썼으나, 그 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되자 1456년(세조 2) 자결했다. 시조 한 수가 <가곡원류>에 전한다.』

『-생육신-

ㅇ 이맹전 : 조선 전기의 문신, 생육신의 한 사람.

→ 본관 벽진. 자 백순. 호 경은. 시호 정간.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급제, 정자·정언 등을 거쳐 외직을 자처하여 거창현감으로 나갔다.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선산에 내려가 평생 도의지교를 맺었던 김숙자 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일생을 마쳤다.

ㅇ 조려 : 조선 전기의 문신, 생육신의 한 사람.

→ 본관 함안. 자 주옹. 호 어계은자. 시호 정절.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명망이 높았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 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에<어계집>이 있다. 

ㅇ 성담수: 조선 전기의 문신, 생육신의 한 사람.

→ 본관 창녕. 자 미수. 호 문두. 성삼문의 6촌. 생육신의 한 사람. 1356년(세조 2)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 때 그의 아버지 희도 관련되어 국문을 받고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후 풀려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 문두리에 은거, 독서와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ㅇ 김시습 : 조선 전기의 학자, 생육신의 한 사람.

→ 본관 강릉. 자 열경. 호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 법호 설잠. 시호 청간.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로 이름이 높았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금오신화>를 지었고,<산거백영>(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ㅇ 원호 :  조선시대 생육신중의 한사람.

→ 본관 원주. 자 자허. 호 무항·관란. 시호 정간.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지내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단종 초에 수양대군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뒤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이에 불응하고 여생을 마쳤다. 1703년(숙종 29) 원주에 정문이 섰고, 원천석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ㅇ 남효원 : 조선 전기의 문신, 생육신의 한사람.

→ 본관 의령. 자 백공. 호 추강·행우·최락당. 시호 문정. 김종직의 문하로 김굉필·정여창·김시습·안응세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 영의정 정창손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만년에 저술한<육신전>은 빛을 못 보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1713년(중종 8) 소릉이 추복되면서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에 제향되었다. 저서에<추강집><추강냉화><사우명행록><귀신론> 등이 있다. 』

ㅇ 논개 : 임진왜란 때의 의인.

→  성은 주씨라고 전한다. 전라북도 장수 태생. 임진왜란 무렵 진주 병사 최경희의 부인이었다. 기생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설이다.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촉석루에서 승전 잔치를 하고 있는 때를 이용하여 술에 취한 왜장 게다니를 끼고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남강에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죽었다. 그 바위는 후세에 의암 이라 부르고 비를 세웠으며 남강가에 사당을 지어 나라에서 제를 지냈다.

ㅇ 권율 : 임진 왜란 때의 장군.

→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젊어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책만 읽다가 마흔 여섯 살 때야 과거에 급제했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 들어가 수비하라는 왕명을 받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진격, 용인까지 왔으나, 잘못된 작전으로 일본군에 패함. 광주로 돌아와 남은 부하들을 맹훈련시킨 뒤 금산의 이치로 나아가 싸워 이겼음. 1593년에는 함께 싸우던 명나라 군사들의 자만과 방종 때문에 왜군에게 대패했음. 그 결과 행주산성이 고립되자 3만여 왜군이 행주산성을 공격, 군사와 백성이 다 함께 적군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적군의 8할을 죽이고 격퇴했음. 이것이 유명한 ‘행주대첩’임.

ㅇ 홍길동 : 조선 광해군 때 교산 허균이 지은 소설. 

→ 활자본. 1책. 한글소설의 효시로 중국소설 <수호전>에서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의 신분 차이의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의 혁명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주인공인 길동은 홍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나 늘 천대를 받고 자란다. 그는 총명한 재주에 학식이 뛰어나 호풍환우하는 법과 둔갑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집을 뛰쳐나와 적굴에 들어가 괴수가 되어 활빈당을 조직한다.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과 토호들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양반계급을 괴롭히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조정의 회유로 부득이 형조판서까지 되었으나 마침내는 고국을 하직하고 난징으로 가다가 율도국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는 이야기이다.

ㅇ 임꺽정 : 조선시대의 의적.

→ 일명 거정. 양주의 백정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와 참모 서림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 남치근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으로 적혀 있다. 

『-삼학사-

ㅇ 홍익한 : 조선 중기의 문신, 삼학사중 한사람.

→ 본관 남양. 자 백승. 호 화포. 초명 습. 시호 충정. 1636년 청나라가 속국시하는 모욕적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을 때 사신을 죽임으로써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을 폈으나, 남한산성에서 왕이 화의하니 오달제·윤집과 함께 선양에 잡혀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음을 당해 적들이 감탄하여 ‘삼한삼두의 비를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 저서에<화포집><북행록><서정록> 등이 있다. 

ㅇ 윤 집 : 조선 중기의 문신, 삼학사 중 한사람.

→ 본관 남원. 자 성백. 호 임계·고산. 시호 충정(忠貞). 병자호란 때 화의를 적극 반대, 척화론자로 오달제·홍익한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선양서문 밖에서 사형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ㅇ 오달제 : 삼학사의 한사람.

→ 본관 해주. 자 계휘. 호 추담. 시호 충렬. 후금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고, 주화파의 최명길을 탄핵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한 뒤 적진에 송치되었으나 적장 용골대의 심문에 굴하지 않아 다시 선양으로 이송, 그곳에서도 모진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아 윤집·홍익한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영의정이 추증. 문집에<충렬공유고>가 있다. 』

ㅇ 박문수 : 조선 영조 때의 문신.

→ 호는 기은. 1727년 영남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간리를 적발함. 1730년 호서어사가 되어 굶는 백성들의 구제에 힘씀.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서 경상도에서 곡식을 실어다가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제, 후에 함흥 만세교 옆에 송덕비가 세워졌음. 1769년 호조 판서가 되어 균역법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음.

ㅇ 한석봉 : 조선 중기의 서예가.

→ 자는 경홍, 호는 석봉, 청사, 이름은 호.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자적인 경지를 확립,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하였음.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계의 쌍벽을 이룸. 필적으로는 <석봉 서법>,<석봉 천자문>등이 보관되어 있고, 실제로 그가 쓴 비문이 남아 있음.

ㅇ 김삿갓 :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 본관 안동. 본명 병연. 속칭 김삿갓. 자 성심. 호 난고. 경기 양주 출생.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이 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즐겨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삿갓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는데, 전국을 방랑하면서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그런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방랑을 계속하여 전라도 동복(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작품으로<김립시집>이 있다. 

ㅇ 김정호 :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

→ 호는 고산자. 가문이 비천했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는 한편, 정밀한 지도를 만들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30여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순조 말년에<청구도>2첩을 완성했음. 그 후<청구도>에 불만을 느끼고 전국 각지를 실제로 가서 조사,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발간함. 또<여지승람>의 잘못을 고치고 보충하기 위하여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썼으며, <지구도>도 만들어 냄.<대동여지도>를 손수 그려 목판으로 만들어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대원군은 나라의 비밀을 퍼트렸다는 죄목으로 목판 지도를 불태우고 감옥에 가둠.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감옥에서 숨짐.

ㅇ 영 조 : 조선 제 21대 왕.

→재위 1724~1776년. 자는 광숙, 호는 양성헌, 이름은 금. 숙종의 넷째 아들. 1721년(경종 1년)8월 왕세자로 책봉됨. 1724년 즉위. 가혹한 형벌을 없애거나 뜯어 고쳐 인구너 존중을 꾀함. 신문고 제도를 되살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고하게 함. 진을 설치하여 토성을 고쳐 쌓는 등 국방 대책에도 힘썼음. 인쇄술을 개량하여<퇴도언행록>,<속대전>,<국조악장>,<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발간함. <악학궤범>의 서문,<어제경세 문답>등을 친히 지어냄.

ㅇ 정조 : 조선 제 22대 왕.

→ 호는 홍재 재위1777~1800년. 1759년 세손에 책봉되고,1762년 아버지 사도 세자가 비명에 죽자 왕통을 이음. 탕평책에 힘썼고, 남인, 북인, 서인을 고루 기용했음. 1791년 천주교를 탄압한 신해 사옥을 일으킴. 규장각을 두어 역대 서적을 보관했으며, 많은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술을 발달 시켰음. 악형을 금지하고 빈민 구제법을 제정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음. 문집 <홍재전서>가 있음.

ㅇ 정약용 : 조선의 실학자.

→ 호는 다산. 실학에 전념, 서양학문과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했음. 18년간 경서학에 전념,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등 많은 책을 지어냈음.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구하는 데 학문의 뜻을 두었으며, 40년 동안 백성들을 위해 일했음. 저서 <정다산 전서>등이 있음. 

ㅇ 전봉준 : 조선 말기의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 별명은 녹두 장군. 1894년 3월 동학교도 중심으로 부안, 정읍, 전주 등을 점령했으나, 외세에 의해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수습하였음.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해 싸워 중 남부 지역과 함경도, 평안남도까지 차지하였으나, 금구 싸움에서 조직적인 일본군에 패하였음. 순창으로 도망, 재기를 꾀하다가 체포, 처형당했음.

ㅇ 김대건 :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 어릴 적 이름은 재복, 세례명은 안드레아. 1836년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영세를 받고, 마카오로 가서 서양학문을 배우고 9년 만에 귀국, 비밀리에 전도에 힘씀. 1846년에 프랑스 신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다 체포되어, 9월 16일 스물 다섯 살로 한강 가 새남터 형장에서 죽었음. 교황청에서 1925년 시복식이 거행되었으며, 한국 전 성직단 대주교로 정해졌음.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에 올랐음.

ㅇ 황진이 : 조선 중기의 기생, 여류 시인.

→ 얼굴이 곱고 시도 잘 짓고 노래에도 뛰어나 많은 풍류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당시의 대학자이며 시인인 서경덕을 비롯해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음. 서경덕,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로 불리었음. <해동가요>,<청구영언>,<가곡원류>등에 시조가 실려 전해지고 있음.

ㅇ 홍경래 : 조선 중기의 농민 반란의 지도자.

→ 1800년 양반의 서자인 우군칙을 만나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 만주 마적단 두목 정시수와 큰 부자인 관리 이희저 등을 포섭해 가산 다복동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음. 1811년 혹심한 퓽년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2000명 군사를 이끌고 평서 대원수라 자칭, 난을 일으켰음. 가산 군청을 습격해 군수를 죽이고, 박산, 정주 등의 8읍을 쳐부수고 평안도 일대의 세력을 잡았음. 그러나 안주 송림리에서 패하고 정주까지 후퇴, 관군과 싸우다가 싸움터에[서 죽었음.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하며, 조선의 대표적인 민중반항운동의 하나로 손꼽힘.

ㅇ 김옥균 : 조선 후기의 정치가.

→ 본관 안동. 자 백온. 호 고균·고우. 시호 충달.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1894년 상하이에서 살해당하여 시체는 본국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음.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새로 조직되자, 총리 대신 김홍집과 법무 대신 서광범의 상소로 반영죄가 풀림. 저서로 <기하근사>,<치도약론>,<갑신일록>등이 있음.

ㅇ 안중근 : 조선 말기의 애국 지사.

→ 의병 운동에 참가해 일본군과 싸웠음. 1909년 10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체포되었음. 6차례의 재판에서 끝까지 항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음.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음. 옥중에서 쓴 <동양 평화론>은 당시의 현실 분석에 뛰어남.

ㅇ 이완용 : 조선 말기의 민족 반역자.

→ 호는 일당. 1896년 외부·학부 대신, 농공상부 대신 서리 등의 직책을 맡았으나, 1901년 친일파로 변절했음. 1905년 을사조약을 지지, 서명함으로써 을사 오적의 한사람이 되었음. 1910년 8월, 한일 합방 조약을 체결, 우리나라를 완전히 일본에 넘겨줌으로써 매국의 원흉이 되었음. 그 공으로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 후작을 받고,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하였음.

ㅇ 윤동주 : 일제 말 암흑기의 저항 문학의 대표적 시인.

→ 1943년 독립 운동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죽었음.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 발간됨. 작품에<자화상>,<무서운 시간>,<별 헤는 밤>등이 있음.

ㅇ 지석영 : 조선의 의학자, 국어학자.

→ 1879년 우리나라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해 성공함.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움. 1909년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자전석요>를 간행, 한자 해석의 새로운 면을 개척함. 저서로 <우두신설>이 있음.

ㅇ 손병희 :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 호 의암. 초명 응구. 후명 규동. 충북 청주 출생. 삼일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 동학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그 뒤,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897년에는 천도교 제3대 교주가 되었다. 1919년 기독교, 불교 대표들과 삼일운동을 일으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병 보석으로 풀려 나와 요양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ㅇ 유관순 : 3.1 운동 때의 순국 소녀.

→ 3.1 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음. 그 해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행렬을 지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며, 부모는 살해되었음. 감옥 안에서 계속 독립 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 갖은 형벌 끝에 옥사했음.

ㅇ 안창호 : 독립운동가, 교육자.

→ 호는 도산. 1897년 독립 협회 가입.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 공학이 점진 학교를 세웠음. 1907년 신민회를 조직,<대한 매일 신보>를 기관지로 발행했음.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설립했음. 청년 학우회를 조직, 민족의 지도적 인재 양성에 힘썼음. 1912년 미국에서 대한인 국민 총회를 조직, <신한 민보>를 창간함. 이듬해에는 흥사단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음.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등을 지내며<독립신문>을 창간했음.1924년 난징에 동명 학원을 설치하였음.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병으로 풀려 나와 치료 중 사망하였음. 일상을 정직과 성실로써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쳤음 저서로 <안도산 전집>등이 있음.

ㅇ 방정환 :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 호 소파,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보성전문을 마친 후 도요대학에서 철학과를 수학했다.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어린이>(1923)의 창간을 비롯<신청년><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했다. 한편 동화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1940년<소파전집>을 박문출판사가 간행하고, 광복 후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소파 동화독본> 전5권을 펴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ㅇ 이수일과 심순애 :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의 주인공

→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는 사랑의 대표주자로 인식

ㅇ 김두한 : 한국의 정치가

→ 호 의송. 서울 출생. 3·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마치고 협객으로 활동하면서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 광복 후 한독당 재정위원·대한민주청년연맹 부위원장·대한노조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지냈고, 반탁운동과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54년 3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고, 1965년 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선거소송,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및 국회발언대에서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미리 준비한 오물을 투척한,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 등 독특한 정치생활을 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72년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ㅇ 이상 : 시인, 소설가.

→ 본명은 김해경, 이상은 필명. 1931년 시 <이상한 가역 반응>,<파편의 경치>등을 잡지<조선과 건축>에 발표했으며, 이듬해 <조선>에 시 <건축 무한 육면각체>를 처음으로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음. 1936년 <조광>

ㅇ 이중섭 : 서양화가.

→ 호 대향. 평남 평양 출생. 오산고보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첨부파일 한국을 빛낸 100인들의 위인들-줄임.hwp

 

출처 : 위유환 역사 교실
글쓴이 : 위유환 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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