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지혜

살아서의 영광 vs 죽음 이후의 영예

루지에나 2017. 10. 13. 11:57

살아서의 영광 vs 죽음 이후의 영예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가공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삶을 반추해 보는 데 있을 것이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읽다 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비단 허구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굳이 이 소설을 계급운동의 관점에서 쓰인 사실주의 소설에 국한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작가의 신산한 삶은 어쩌면 오늘을 사는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고 또 우리 이웃의 그 누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여성 작가 강경애는 간도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인간문제를 썼는데 동아일보(193481~ 1222)에 연재가 끝났지만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도 못했다. 그 바람에 작가로서 정당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194438세로 요절했다. 그의 죽음도 쓸쓸했다. 매일신보를 제외한 한글로 된 모든 신문과 잡지가 폐간 된 일제 말기여서 그의 죽음은 세인과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간도에서 살아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를 두어 소위문단 사교를 하지 않았다. 1930년대 노동운동을 가장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 낸 최고의 작가로 꼽히지만 이른 바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소속의 작가도 아니다. 카프에서도 강경애는 잊힌 존재였다.

인간문제는 그의 사후인 1949년 남편 장하일이 부부필로 있던 북한 노동신문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하지만 남북에서 정치적 이유로 일부 개작된 비운의 소설이다. 그러다 남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성해방 운동이 부상하면서 여성해방 문학론이 전개되자 50년 정의 한 여성 작가의 삶과 문학에 대해 관심이 쏟아졌다.

문단 사교에 능해 생전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들이 사후에 문학사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강경애는 오히려 사후에 높이 부각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명나라 중기의 명신 유대하는 한 사람의 삶은 관 뚜껑을 덮고 난 후에 노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강경애는 말하자면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작가라고 하겠다.

 

지배와 착취라는 인간의 문제

강경애의 인간 문제는 서두에 원소라는 못에 얽힌 전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겪었던 지배와 착취라는 인간 문제의 원형이 담겨 있다.

예날 이 원소가 생기기 전에 이 터에는 장자 첨지가 수 없는 조들과 전지와 살진 가축들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첨진 하도 인색하여서 연년이 추수하는 곡식을 미처 먹지 못하고 곡간에서 푹푹 썩어 내도 근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은 고사하고 어쩌다 걸인이 밥 한 술을 구걸하여도 그것이 아까워서 대문을 닫아걸고 끼니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몇 해를 거푸 흉년이 들어서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장자 첨지에게 애걸을 하였다. 그러나 첨지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고 문간에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몰래 작당을 하여 가지고 밤중에 장자 첨지네 집을 급습하여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 만에 장자 첨지는 관가에 고소장을 들여 이 근처 농민들을 모두 잡아 가게 하였다. 그래서 무수한 악형을 하고 혹은 죽이고 그나마는 멀리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딸을 잃어버린 이 동네 노인이며 어린 것들은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혹은 아들과 딸을 찾으며 장자 첨지네 마당가를 떠나지 않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 울과 또 울어서 그 눈물이 고이고 고인어서 마침내는 장자 첨지네 고래 잔등 같은 기와집이 하룻밤 새에 큰 목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소의 전설은 바로 이 소설의 모티프로 작용한다. 용연마을 사람들의 삶은 원소 전설의 현실적 재현처럼 느껴지고 전설 속 장자 첨지는 지주인 정덕호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덕호는 용연마을의 지주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으며 자기 땅을 부치는 소작인과 농민들을 착취한다. 간난이와 선비 등 젊은 여인들을 농락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늒지 못한다. 덕호의 횡포에 대응하는 농민들은 원소 전설 속에서 장자 첨지에게 원성을 보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이에 순응한다.

그러다 남녀 주인공인 첫째와 선비가 덕호의 횡포와 성적유린으로 고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가라는 새로운 횡포에 다시 직면한다. 즉 인간문제는 농촌 마을인 용연과 도시인 인천의 공장가라는 두 개의 상반된 공간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의 불행과 변절한 그들

줄거리의 대강을 살펴보면 선비의 아버지는 마름 소작인으로 덕호의 일꾼인데 그의 심부름으로 빚을 받으러 갔다가 소작인을 도와 준 죄로 덕호에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죽는다. 그 후 어머니마저 가슴앓이 병으로 죽자 선비는 덕호의 집에 얹혀 살며 집안일을 돕게 된다.

덕호의 꼬임에 정조를 잃은 선비는 그의 집을 도망쳐 나와 자신에 앞서 덕호의 첩이었던 간난이를 찾아 서울로 간다. 간난이는 임신을 못해 쫓겨났다. 선비는 간난이를 만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인천의 방적 공장에 취직해 새 삶을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인 첫째는 선비를 좋아하던 소작인이다. 첫째는 친구의 빚 때문에 덕호에게 반항하다가 그의 술책으로 소작하던 밭을 모두 떼이고 쌀을 도둑질하다 고향을 떠나 인천의 부두 노동자가 된다.

다른 한편 서울에 사는 대학생 신철은 덕호의 딸 옥점이를 따라 여름방학 때 덕호의 집에 왔다가 선비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옥점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가출하고 인천 부두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첫째를 만나 그를 노동 운동가로 학습시킨다.

그렇게 용연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첫째와 선비, 간난이는 모두 인천에서 신철과 연결되어 노동운동에 가담한다. 그런데 이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인천 붇구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검거되자 방적공장의 간난이는 자신의 임무를 선비에게 맡기고 공장을 탈출한다. 선비는 공장 감독의 성적 유혹을 뿌리치며 노동에 혹사당하다가 폐결핵이 악화돼 죽는다. 첫째는 신철을 만나 계몽되면서 부두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지만 그의 전향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째는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선비의 시신을 마주하게 된다. 죽은 선비를 보고 인간이 해결하려 한 인간 문제는 신철과 같은 지식인에게 찾을 것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 천만 년을 두고 싸워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 천만 년을 두고 싸워 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 나갈 인간이 누굴까?

소설은 이런 절규로 끝난다.

이 소설을 읽다 신철의 전향을 접할 때면 일제 강점기 수많은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처신 혹은 변절을 떠올리게 된다. 신철은 대학 동기인 박병식 판사에게 이런 회유의 말을 들은 후 초라한 행색의 아버지를 보고서 결국 전향하게 된다. “나 혼자가 더 그랬댔자 오늘 낼로 곧 혁명이 될 것도 아니요, 또 안 그랬댔자 될 혁명이 안 될 것도 아니니, 이 세상에 한번 나서 어찌 나 개인을 그렇게도 무시할 수가 있는가? 더구나 자네나 나는 집안 형편이 딱하게 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이 감옥에서 십 년이 될지 , 몇 해가 될지 모르는 그 세월을 희생할 생각을 해 보게.

강경애는 신철을 전형적인 소브르주아지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기린다. 이는 지난 우리 역사의 불행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이 소설이 주는 인간 문제의 근원적인 물음일 것이다.

반면 작가는 지식인 신철보다 부두 노동자인 첫째에게 새로운 사회를 그려 나가는 주역으로 무게를 실어 준다. 이는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지식인 양주동과의 동거와 그에게 실망한 경험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올 한 해 제대로 살았는가?

작가 강경애는 개천에서 난 용이 되기 위해 마치 무소의 뿔처럼 저돌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강경애의 문학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당시 청년 양주동은 사구의 자유로운 사상에 경도되어 반봉건 사상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 강의를 들은 강경애는 그 길로 밤중에 양주동을 찾아갔다.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전 중학교 3년생, 아무 것도 아직 몰라요. 그러나 문학적 소질을 담뿍 가졌으니 좀 길러 주세요.

21살의 양주동은 18살 강경애의 이러한 열정에 빠져들게 된다. 이들은 서울로 와 동거했고 1년 남짓한 동거 기간에 강경애는 양주동이 간여하는 문학지에 글을 발표하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서로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사람은 192491일 서로 갈라졌다고 양주동은 쓰고 있다. 양주동의 절충주의 적 평론이 발단이었다. 강경애는 1920년대 후반 민족주의 문학과 무산계급 문학론의 절충을 주장했던 중간파 양주동의 평론 태도와 그의 이론인 절충주의를 강력 비난하고 나셨다. 연인에게 적대자로 변한 이들의 만남과 결별은 인간 사회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강경애와 결벌한 양주동은 장연 지주의 딸과 결혼해 처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소설 속 신철의 행로는 조혼을 파기하면서 반봉건적 유습 타파을 외치고 강경애와 동거하다 부잣집 딸과 재혼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청년 양주동의 모습과 오버 랩 되기도 한다. 신철과 같은 얼굴은 지금 여기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선비를 성적으로 유린한 덕호 형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덕호와 같은 권력자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하는 덕호의 딸 옥점과 옥점의 친모와 같은 얼굴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행 대신 전향을 선택하고서 부자 집 딸과 결혼한 신철형 얼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올 한 해 어떻게 살아왔는가, 덕호 처럼 노추와 탐욕의 화신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는지, 신철처럼 하루아침에 신념을 저버리면서 동료를 배신하고 일신상의 편안함을 추구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옥점이나 옥점의 친모처럼 가련한 선비와 같은 여성을 학대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리고 소설 속에서 우직하게 이웃을 사랑으로 한결 같이 대하고 신념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부단히 자기 혁신을 하면서 살아가는 첫째형 얼굴을 새해에는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