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관하여

[스크랩] 행동경제학2

루지에나 2010. 12. 15. 19:37

우선 인간은 먼 미래를 판단할 때와 가까운 미래를 판단할 때 그 기준이 일치하지 않는, '중요한 비합리'를 저지른다는 게 행동경제학의 분석이다. 이 실험에서처럼 숙제 마감에 대해 자율성이 주어지면, 슬기롭고 합리적으로 최적점을 찾아 만족과 학점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경제학의 기대이다. 하지만 실제로 학생들은 가까운 미래의 '숙제 미루기'라는 작은 달콤함과 먼 미래의 '숙제 몰아치기'라는 큰 고통 및 감점을 제대로 비교하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학생의 실패'는 한두번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이 늘 그렇듯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후회를 하고도 방학 숙제는 또 밀리고, 시험 공부는 또 벼락치기가 되니까….

학생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란 무릇 그렇다. 최정규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인간이 합리성으로부터 일시적으로만 이탈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누적적이고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이탈한다는 점에서, 경제학의 '코어'인 인간 합리성은 공격을 당하기 시작한다"고 진단했다. 인간의 지속적인 합리성 이탈은 '가까운 미래로의 몰입' 이외에도 '손실에 대한 과도한 회피', '소유품과 현상 유지에 대한 과잉 집착', '첫인상에 따른 어이없는 오판', '고정관념에 턱없이 휘둘리는 인상(印象)' 등에서도 두루 나타난다.

그래서 댄 애리얼리 교수와 도모노 노리오 메이지대 교수는 "인간이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그 비합리성에 일정한 경향이 있어서 예측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비합리성도 이론적 분석의 대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부가 빅 브라더처럼 간섭하고 독재하라는 걸까? 그건 아니다. 이 실험에서도 '스스로 제출 기한을 정해보는' 약간의 자율적 제한을 통해 학점과 행복감이 늘어났듯이, 인간은 미세한 자극과 유도(誘導)만 주어지면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으로 옮겨 탈 줄 안다는 것이 행동경제학의 믿음이다.

시카고 대학의 리처드 탈러(Thaler) 석좌교수는 이 통찰을 '넛지(nudge·팔꿈치로 옆구리를 슬쩍 찌르기)'라는 멋진 단어를 통해 선명하게 표현해낸다. 리처드 탈러는 이를 또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라고 부른다. '넛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장과 개인에 터잡은 자유주의를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고민의 발로(發露)다.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마케팅학은 가장 뜨겁게 행동경제학을 흡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은 지속적으로 고정관념에 턱없이 휘둘린다'는 행동경제학의 분석은 '강렬한 브랜드의 중요성'으로 변주(變奏)된다. 심지어 강렬한 브랜드가 뇌의 어느 부분을 활성화시키는가 하는 진단까지 내놓는다.

정책·캠페인 담당자들도 유익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권자에게 단지 "내일 투표할 거냐"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실제 투표율을 높일 수 있다. 또 인간이 손실에 더 과민반응하는 속성도 '넛지' 식으로 응용할 수 있다. '당신이 에너지를 절약하면 연간 35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캠페인을 '당신이 에너지를 절약하지 않으면 연간 350달러를 잃게 된다'고 살짝 바꾸면, 그 내용은 사실상 똑같아도 효과는 커지는 것이다.

'이혼 숙려(熟慮)제'도 이런 넛지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혼처럼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인간은 충분히 숙고하게 마련이므로 한두달 더 생각한다고 판단이 바뀔 리 없다'는 반론이 있었지만, 현실은 역시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음을, 그래서 '숙려제의 넛지' 덕분에 흥분에 휘말린 속단을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개인들은 조금 기분 나쁠 수 있다. 스스로가 자부해온 만큼 현명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가 많다는 교훈을, 행동경제학은 굳이 곱씹으라고 충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대체로 비합리적이라는 데서 오히려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본인의 소비욕을 강한 의지만으로 절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장기 보험에 가입해버리는 '사고'를 치는 식으로 본인의 행복 총량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다. 학생들이 페이퍼 마감 서약서를 적어내서 학기말의 몰아치기 고통을 줄였듯이….

행동경제학은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글로벌 경제난과 함께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많은 경제 주체들의 비합리성이 얽히고 부풀어 오르면서 이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위기가 지난 후 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영역 사이에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과정에서 행동경제학은 중요한 분석틀로 작용할 전망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리 겔만(Gell-Mann)은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입자(粒子)들이 모두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물리학이 얼마나 어려워질까?"

물리학의 '입자'가 바로 경제학에서는 '인간'이다. 그들은 '생각'을 한다. 그것도 저마다 다르고 자주 비합리적으로…. 그렇지 않아도 위기와 도전에 휩싸인 경제학 앞에는 더욱 힘든 여정(旅程)이 기다리고 있다.

출처 : 행동경제학2
글쓴이 : 작은도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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