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 채권 투자회사 '핌코'모하메드 엘 에리언 CEO 인터뷰
'중심부의 붕괴 시대'… 1100조원 사나이의 조언
"정부와 악수를, 신흥시장에 투자를, 인플레에 대비를"
세계 최대 채권 투자회사 핌코(PIMCO)의 본사는 태평양이 굽어 보이는 뉴포트비치 해변에 있었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니 트레이딩룸이 나왔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의 4배 가까운, 약 1100조원의 돈을 굴리는 곳이다.
엄청난 운용자산 규모에 비해 방 크기는 생각보다 다소 작았다.
390㎡ 정도라니 서울의 중형 아파트 3~4개 정도 크기다.
(물론 핌코는 뉴욕, 런던, 도쿄, 홍콩 등 세계 곳곳에 사무실이 있다.)
트레이딩룸 풍경은 여느 투자은행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모니터의 숲 사이사이에 온갖 종류의 채권에 특화된 150명의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파묻혀 있었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긴 블룸버그 티커(ticker) 화면엔
수많은 빨간 숫자들이 마치 거대한 뱀이 헤엄치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트레이딩룸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속삭이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외엔 들리지 않았다.
핌코의 오랜 전통은 트레이딩룸은 조용해야 하고, 펀드매니저들은 극도로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레이딩룸 한가운데에,
햇살이 반짝이는 태평양의 풍광을 유리창 뒤로 하고,
다른 책상들과 구분되는 큰 책상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홍보 담당 부사장인 마크 포터필드는
"1000피트 상공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곳"이라고 했다.
한쪽엔 핌코의 CEO인 모하메드 엘 에리언(Mohamed El Erian·51)이 앉고,
그 옆엔 '채권왕'으로 불리는 핌코의 창업자이자 현재 엘 에리언 사장과 함께 공동 최고투자책임자(CIO)를 맡고 있는 빌 그로스(Bill Gross·65)가 앉는다.
기자는 엘 에리언 사장과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아쉽게도 빌 그로스는 출장 중이었다.)
이집트계 미국인인 엘 에리언 사장은 요즘 핌코 사장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몫 이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IMF에서 15년간 일하고 하버드대 기금 관리회사 사장을 역임한 그는
격동하는 최근 세계 경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구루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요즘 세계 경제 전문가들의 최고 유행어 중 하나가 된 '뉴 노멀(new normal)'이란 개념을 창안했다. 이 개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그의 책
〈새로운 부의 탄생(원저 When markets collide)〉은 2008년 FT와 골드만삭스로부터 최고의 비즈니스북으로 선정됐다.
뉴 노멀은 위기 이후의 세상이 나아갈 새로운 목적지를 의미한다.
2002~2006년의 태평성대를 나타내는 '올드 노멀(old normal)' 혹은 '대완화(The Great Moderation)'에 대비되는 말이다. 엘 에리언 사장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올드 노멀의 환상에 젖어 있다"고 말한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혹은 막 벗어나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머지않아 평온했던 올드 노멀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심리에 뿌리 박힌 '평균으로의 회귀(mean reversion)'라는 생각의 관성(慣性)에 기인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균형에서 벗어나면 언젠가 다시 균형으로 돌아가고, 평균에서 벗어나면 언젠가 다시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생각 말이다.
- ▲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 비중을 크게 늘리고, 인플레이션 방어에 신경 쓰라.”1100조원을 굴리는 사나이, 모하메드 엘 에리언의 3년을 내다본 조언이다. /이지훈 기자
그러나 그는 "이번 위기 이후의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우리는 최악의 위기에서는 벗어났고, 좀더 안전한 세상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과거에 우리가 늘 익숙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게 이 사람의 주장이다. 바로 뉴 노멀이다.
세계 경제 성장률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과거보다 낮아질 것이며, 정부의 '보이는 손'의 힘은 보다 강력해질 것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대형 엔진 하나에 기대어 고공(高空) 비행을 하던 시대에서 여러 개의 작은 엔진으로 저공(低空) 비행을 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엘 에리언 사장은 "새 목적지는 전혀 낯설 뿐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여정(旅程) 또한 험난할 것"이라고 말했다.
빌 그로스와 모하메드 엘 에리언의 책상엔 4개씩의 블룸버그 모니터가 있다. 각각 주식, 채권, 환율, 원자재 데이터를 표시한다. 두 사람은 매일 새벽 가장 일찍 출근하기 경쟁을 벌인다고 포터필드 홍보 부사장이 말했다. 엘 에리언사장은 새벽 4시15분 이곳에 도착한다. (그때쯤 뉴욕은 오전 7시15분이 된다.) 다른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할 시간부터 그는 뉴 노멀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왜 올드 노멀로 돌아가지 않고, 뉴 노멀로 간다는 것인가?
"이번 위기가 중심부(center)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위기는 모두 주변부의 위기였다. 1997년 아시아, 1998년 러시아, 2001년 아르헨티나, 2002년 브라질 경제위기가 그랬다. 시스템이란 중심을 주변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중심은 늘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엔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
- ▲ 엘 에리언 사장은 핌코의 경쟁력으로 '늘 질문을 던지는 문화'를 꼽았다. '소음(noise)' 속에서 '신호(signal)'를 포착하는 비결이다. /핌코제공
―중심부의 위기는 어떤 점에서 심각한가?
"중심부는 세계 경제에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한다. 국제 기축통화(reserve currency)와 가장 깊고 유동성이 큰 자본시장, AAA 등급의 무위험 신용을 제공한다. 또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이자 최후의 소비자(consumer of last resort)이기도 하다. 몇 년 전까지 미국이 이 모두를 공급했다. 그러나 중심부가 흔들리니 사람들은 이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심부가 공급해온 모든 공공재들도 쇼크를 받게 됐다. 누가 이런 공공재를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것이 불확실해졌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 방식을 바꿔야 한다. 지난해의 위기가 향후 수년간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미래를 당신보다 밝게 보는 것 같다.
"올 하반기는 예상보다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중환자가 엄청난 약을 먹고 난 뒤 갑자기 좀 나은 것으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래, 난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엘 에리언 사장은 말을 매우 조리 있게 했다. 적절한 비유를 들어 귀에 쏙쏙 들어오게 이야기했다. 그대로 받아 쓰면 책이 될 정도였다.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첫째, 둘째" 해가며 대답했다.
그는 "2009년에 미국이 좀 호전됐다고 느낀 이유는 세 가지"라고 말을 이어갔다.
"첫째, 엄청난 규모의 경기 부양책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부양책을 본 적이 없다. 둘째, 재고(在庫) 사이클이다. 너무 가파르게 내려가고 나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조금 올라가기 마련이다. 셋째, 미 연준(Fed)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리스크를 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지금 같은 제로 금리라면 현금을 들고 있기 어렵다. 올 하반기에 좋은 숫자들이 나온 것은 이 세 가지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시장은 2009년은 물론 2010년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었다."
―당신이 보는 2010년은 어떤가?
"성장은 둔화될 것이고, 실업률은 계속 오를 것이다.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경기 부양책이 효과 면에서 지금 최대점에 와있다고 본다. 연말쯤엔 부양책의 강도가 저하될 것이고, 전년 대비 경제성장률을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 우리가 접하는 모든 기업인이 '회사 규모를 재조정(resizing)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예전과 같은 고용과 재고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셋째, 매우 낮은 금리가 달러 약세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볼 때 2010년은 미국에 훨씬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내년이 두려워진다.
"너무 걱정 마라. 이것은 글로벌 이슈가 아니니까. 이것은 미국과 영국의 문제이다. 2010년이 되면 뉴욕에서 더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갈수록 세상은 훨씬 좋아 보일 것이다. 아시아는 초기 조건이 훨씬 좋다. 아시아는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이고, 적자국이 아니라 흑자국이고, 금융부문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미국과 영국이 왜 문제인 줄 아는가?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이렇게 말하더라. '모든 문제는 금융서비스산업이 서비스라는 말을 떼고 금융산업으로 이름을 바꾼 데서 출발했다'고. 금융이 너무 커져서 실물 경제를 서비스하는 데 필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다시 풀고 있다. 이는 미국과 영국에서 지금까지 가능했던 많은 일들이 앞으로는 가능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 ▲ 엘 에리언 사장의 책상 위. 1100조원을 굴리는 사람의 책상도 여느 사람과 별다를 게 없다. 그는 하루 중 절반은 이곳에서, 나머지 절반은 트레이딩룸에서 보낸다. /이지훈 기자
■하나의 대형 엔진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여러 개의 작은 엔진이 움직이는 세상으로
―아시아에선 사람들이 미국처럼 금융위기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자산 가격이 고점을 경신하고 있다.
"위기를 먼저 경험한다는 것은 늘 도움이 된다. 아시아는 1997~1998년의 위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아시아는 이번 위기를 훨씬 좋은 조건에서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아시아가 좋은 모습을 보이는 데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많은 사람이 미래 세계 경제의 성장이 상당 부분 아시아에서 기인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세계의 돈이 홍수처럼 아시아로 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아시아 시장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산 가격이 치솟고 있다."
―아시아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과거 한때 모든 사람이 디커플링이 올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위기가 터지면서 '디커플링은 없다' 이렇게 됐는데, 이제 다시 디커플링 이야기가 나온다. 한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내가 만일 팔이 부러졌는데, 다리는 아무 문제없이 움직인다면 이것은 디커플링이다. 그런데 만일 심장마비가 온다면 팔도 다리도 못 움직인다. 하지만 이것은 디커플링에서 리커플링(recoupling·재동조화)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인 것이다. 우리의 다리가 팔에 더 민감해져서가 아니라, 심장에 마비가 왔기 때문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디커플링을 향한 긴 여행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 가끔 세상을 리커플링시키려는 사건도 일어난다."
―과연 디커플링이 가능할까 하는데 대해 많은 사람이 의심을 품고 있다.
"디커플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다. 많은 신흥시장 국가들이 질곡에서 벗어나 자생적인 성장 동력을 마련해가고 있다. 다만, 디커플링을 다른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 아시아가 미국을 수렁에서 끌어올릴 만큼 강해진다는 의미로 디커플링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디커플링은 가능성이 적다고 믿는다."
―당신은 '지금까지는 미국이라는 하나의 엔진이 세계 경제를 움직였다면, 앞으론 여러 개의 작은 엔진이 세계 경제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변화가 충분히 의미 있어지는 것은 언제쯤일까.
"매일매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바람직하다. 다극화된 세계는 일극화된 세계보다 안정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번 거기에 도달하면 한층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비행기를 운항하는 도중에 엔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엘 에리언 사장은 디커플링이 충분히 의미 있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난관을 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첫째, 미국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미국의 실업률이 이례적으로 높다. 문제는 미국 경제가 고실업 상황에 맞게 설계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미국엔 사회안전망이 충분치 않다. 지금까지는 텍사스에서 일자리를 잃으면 캘리포니아로 가거나, 오클라호마로 가라는 식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실업률 10.5% 시대가 지속된다면 보호주의 압력이 높아질 것이다. 내년 11월 미국에 선거가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미 어제(3일)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버지니아와 뉴저지를 잃었다. 둘째, 새로운 엔진들이 기류(氣流)를 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엔진이 되기 싫어' 하는 움직임이 나올 수 있다. 너무 많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중국의 문제이다."
―중국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렇다. 중국은 변화하되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바뀔 것이다. 하루아침에는 되지 않는다. 중국이 역사에 대해 매우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한발 한발 나아갈 것이다."
―달러 이야기를 해보자. 얼마 전 누리엘 루비니 교수가 FT에 "'모든 캐리 트레이드의 어머니(최근의 달러 캐리 트레이드를 의미·편집자 주)'가 결국 터지고 말 것"이라고 썼다. 동의하나?
"그렇다. 일부 시장은 설탕을 너무 많이 먹은 어린아이처럼 너무 활발해졌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냉정을 되찾고, 후유증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달러 캐리 트레이드(dollar carry trade·저금리의 달러 자금을 빌려 세계 각국의 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의 경우,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가 자금 조달 통화(funding currency)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글로벌 경제에 좋지 않은 조합이다. 캐리 트레이드에서 자금 조달 통화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가 계속 떨어진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투자자들은 지금 달러를 빌려서 한국의 원화나 브라질 레알화를 산다. 그리고 뒤에 달러는 약해지고, 원화나 레알화는 강해짐으로써 돈을 벌게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국제 기축통화란 사람들이 그 가치에 신뢰를 가질 때 유지된다. 이처럼 달러 캐리 트레이드는 내생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결국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바로 루비니 교수, 그리고 우리가 지적하려는 점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피 좀 더 하실래요?"라고 물었다. "예"라고 했더니 황송하게도 직접 커피포트를 들고 와서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졸지에 기자는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4배 가까운 돈을 굴리는 회사의 CEO로부터 직접 커피를 서비스받는 호사를 누렸다.
■신흥시장 투자 늘리고,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라
―올해 내린 가장 중요한 투자 결정이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담보부 채권에 투자한 것이다. 우리는 모기지 금리가 낮은 수준에 머물 것으로 확신했다. 주택시장이 경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과 올 초에 모기지를 많이 샀다. 그런데 정부가 모기지를 사들이기 시작해 우리가 투자한 것을 현금화할 수 있었고,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중요한 결정은 금융채에 투자한 것이다. 우리는 몇몇 금융기관이 (발행한 채권이) 과매도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 금융채를 사들였고 뒤에 값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 대목에서 "지금 우리는 다시 '위험 축소'모드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테이블에서 리스크를 치울 타이밍"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판단 미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을 분석하는데 더 시간을 쓴다"고 하면서. "우리는 '달러 캐리 트레이드'의 파급 효과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7~8월이면 시장이 상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9월 말까지 강세장이 계속됐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를 꼽는다면?
"만일 당신이 오늘 결정한 뒤 3년 동안 전혀 손대지 않겠다고 한다면 두 가지를 추천하겠다. 첫째, 신흥 경제(emerging economies)에 대한 자산 배분을 훨씬 크게 늘려라. 둘째, 인플레이션 방어(inflation protection) 수단에 대한 비중을 훨씬 크게 늘려라. 이 두 가지는 향후 3년간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3년 이전에라도 손을 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위 두 가지 투자를 실행하되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신흥시장은 이미 너무 멀리 갔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돈이 들어와서 그렇다. 따라서 나는 앞에 말한 투자의 실행을 당장 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할 것이다. 장차 그렇게 할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플레이션 방어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은 책에서 '레몬시장 이론(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애컬로프 교수가 주창한 이론)'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그 이론 때문에 실제로 덕을 본 적이 있는가?
"물론이다. 모든 투자자의 꿈은 보석(寶石)을 낮은 가격에 사는 것인데, 레몬시장 이론은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고(中古) 자동차 시장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좋은 자동차와 불량 자동차를 구별하기 위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고 가정하자. 결과적으로 판매 대상 차량 가운데 불량 차량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결함이 없는 자동차의 시장 가격마저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아무리 좋은 차를 갖고 있는 사람도 시장에 너무 '소음'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차라는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결국 제값을 못 받게 된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사태 이후 브라질이 그랬다. 그때 사람들은 말했다. 이것은 단순히 아르헨티나의 문제가 아니고, 남미 전체의 문제라고. 그래서 브라질의 채권 가격이 급격히 떨어졌다. 브라질의 펀더멘털은 튼튼했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2002년 10월(당시 엘 에리언은 핌코의 신흥시장 투자 책임자였다)에 브라질 채권을 값싸게 살 수 있었다. 당시 액면가 1달러짜리 채권을 45센트에 샀는데, 이것이 지금은 140센트가 됐다."
―최근 빌 그로스는 '정부와 악수하는 전략(정부 정책을 주시하며 투자한다는 이야기·편집자 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핌코가 미국 정부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해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빌 그로스가 말한 '정부와 악수한다'는 의미는, 언젠가 정부가 사들일 자산을 사라는 의미이다. 이번 위기 이전에 정부는 축구의 심판 같았다. 심판이고 규제자였다. 그런데 위기 이후엔 규제자라기보다 주요 플레이어가 됐다. 정부 스스로 모기지를 사들이고, 국채를 사들인다. 자, 이제 투자자들은 결정해야 한다. 어느 팀에 들어갈 것인가? 정부와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정부와 한팀이 될 것인가. 이해의 상충 문제는 이것과는 좀 다른 이슈에서 비롯된다. 지난해 정부가 핌코에 자문 서비스를 요청했다. '핌코 자문'이란 팀이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 팀은 완전히 독립돼 있다. 바로 아래층에 있지만, 나는 거기에 변호사와 함께가 아니면 가지 못한다. (양복 상의 포켓에서 사원증 카드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 카드로는 그곳 문을 열 수 없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그곳에 가봤다. 빌 그로스와 함께 갔는데, 빌 그로스가 '감사한다는 말과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함께 간 변호사가 '빌이 지금 감사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고 다시 말을 전달했다."
―빌 그로스와 업무 분장은 어떻게 하나?
"우리는 서로 아주 잘 맞는다. 내가 정부와 학계에 몸담은 경험이 있다면, 그는 오랜 시장에서의 경험이 있다. 우리는 똑같은 그림을 전혀 다른 각도로 보곤 한다. 스타일도 서로 다르다. 나는 무엇이 잘못될까 염려하는 편이고, 위험 회피적인 성향이 되기 싶다. 그런데 빌 그로스는 승산(勝算)을 계산하는데 탁월하다. 이는 블랙잭 도박사였던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다. 우리는 서로 자주 이메일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한다."
―G20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잘될까?
"G20은 첫걸음이다. 기존의 G7은 날로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만일 내가 글로벌 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할 수 있다면 캐나다나 이탈리아에 이렇게 말하겠다. '매우 고맙다. 그동안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다. 하지만 이제 귀국들은 더 이상 시스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4개의 신흥시장 국가를 집어넣을 것이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내년에 한국이 G20 의장국이 된다. 한국에 조언한다면?
"테마를 잘 잡아야 한다. 주요 테마로 세계적 고용 문제를 다루는 것을 검토해 보라.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실업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면 더욱 보호주의적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실업 문제를 전 세계로 전염시킬 수 있다. 고용 문제는 많은 사람이 과소평가하는 중요 이슈라고 생각한다."
■새벽 4시15분에 출근하는 사나이
―하루 일과는?
"오전 3시에 자명종이 울린다. 그리고 회사에 4시15분~4시30분경에 도착한다. 그리고 오전 9시까지는 계속 트레이딩룸에 있다. 포트폴리오를 검토하고, 투자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는 CEO라는 '모자'를 쓴다. 일반적인 사장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만나고, 비즈니스 이슈를 다룬다. (그는 CEO 일을 할 때는 트레이딩룸에서 조금 떨어진 별도 사무실에서 일한다. 인터뷰는 이 사무실 옆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다시 트레이딩룸으로 돌아가 1주일에 네 차례 열리는 투자위원회 회의에 참여한다. 오후 3시까지 회의가 열리는데, 빌 그로스가 주재한다."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나?
"회의를 하면서 먹는다. 샌드위치도 먹고, 여러 가지를 먹는다. 결코 멋있지 않은 것들이다. 보면 놀랄 것이다."
―그리고는?
"오후 3시에 다시 CEO의 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오후 6시에 귀가하고, 보통 오후 8시쯤 잠자리에 든다."
―다른 사람이 따라 하기 힘든 일상이다.
"다행히 가족들이 참아주고 이해해준다. (그에겐 아내와 5살짜리 딸이 있다. 그의 책상 한편에 두 사람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건 주중이 아니라 주말이다. 주말이 되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됐구나.' 문제는 개가 있다는 것이다. 매우 똑똑한 개다. 평일에 내가 오전 3시에 일어나면 개는 쳐다보기만 하고 계속 잠을 잔다. 그런데 주말이 되어 내가 오전 5시가 돼도 일어나지 않으면 개는 주말이 왔다는 것을 안다. '이제 외출할 수 있게 됐구나' 하면서 참을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내 얼굴을 핥고, 소리를 낸다. 주말 오전 5시30분쯤 우리 집 앞을 지나면 내가 개와 함께 산책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주말에도 잠을 푹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자 엘리베이터 입구에 중국의 병마용(兵馬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물론 모형이다.) 핌코의 성공 비결을 거기서도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중심의 생각에 구속되지 않고 늘 세상을 넓게 바라본 것, 그래서 이집트계 미국인인 모하메드 엘 에리언을 사장 자리에 자신 있게 앉힐 수 있었던 것, 이것이야말로 1100조원을 굴리는 핌코의 저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총 운용자산=9404억달러 (약 1090조원·2009년 9월 현재) ※2009년 한국 정부 예산 302조원, 2008년 버크셔헤서웨이 총자산 2674억달러
-창업자=빌 그로스(Bill Gross·65), 별칭 채권왕
-대표 펀드=토털리턴펀드(운용자산 1857억달러·2009년 9월 현재)
-주요 고객=연금 펀드 및 퇴직 펀드 가입자를 포함해 미국에만 800만명 이상, 세계 다른 지역에도 수백만명. 각국 중앙은행, 기업, 대학, 재단에도 자산 운용 및 자문 서비스 제공.
-종업원 수=1200명
◆모하메드 엘 에리언은 누구?
1100조원을 굴리는 사나이 모하메드 엘 에리언의 이력을 보면, 진정한 국제인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외교관이었던 이집트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과 이집트, 프랑스, 영국에서 공부했고,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IMF에 들어가 15년 동안 일하면서 중동 담당 부국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97년 말 39세의 나이에 IMF를 그만두고, 솔로먼스미스바니에 합류하면서 투자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99년 핌코에 합류한 그는 약 7년간 30억달러 규모의 신흥시장 펀드를 맡아 연 19%의 수익률을 올렸다. 2005년 핌코를 떠나 2007년 말까지 하버드대 기금 관리회사인 하버드투자자문(HMC) 사장으로 잠시 외도했다. 하버드대 기금은 2007년 6월에 끝난 회계연도에 23%의 수익률을 기록해 57억달러가 불어났으나, 그가 떠나고 난 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수익률이 급전직하했다.
그는 2008년 1월 CEO로 핌코에 복귀했다. 그는 현재 전미경제연구소(NBER)와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이사회 멤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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