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개방정책을 뿌리내린 중국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19일 숨졌다. 그는 중국 쓰촨성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호치민, 저우언라이 등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문화혁명 동안 권좌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1974년에 복권됐다. 1974년 유엔총회에 중국대표로 참석한 덩샤오핑은 연설에서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곳곳에서 다른 인민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인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한다”라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1978년 마오쩌둥의 후계자 화궈팡을 실각시키고 실권을 장악한 그는 20년간 개혁개방노선을 표방하며 중국에 시장경제체제를 적극 도입했다.
덩샤오핑[ 鄧小平 ]
1904. 8. 22 중국 쓰촨 성[四川省]~1997. 2. 19 베이징[北京].
중국의 정치가.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정통 공산주의 이론을 포기하고 중국 경제에 자유기업의 요소를 혼합시키고자 했다. 프랑스에서의 유학기간(1921~24)중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그후 소련 유학(1925~26)을 마치고 귀국하여 장시[江西] 소비에트에서 지도적인 정치·군사 조직가가 되었다. 장시 소비에트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서남지방에 세운 공산당의 독자적인 지배지역이었다. 덩은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1934~35)에 참여하여 중국 서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로 이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중국과 일본의 전쟁기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공산당이 패권을 차지한 뒤인 1952년 총리가 되었다. 1954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덩은 대외정책과 국내정치 면에서 모두 중요한 정책결정자였다. 덩은 류사오치[劉少奇] 같은 실용주의적인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실용주의적인 지도자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물질적인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기술·경영 면에서 숙련된 엘리트를 양성하자고 주장했다. 그결과 덩은 점점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덩은 1960년대 후반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급진파가 일으킨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공격을 받고 1967~69년에 당과 행정부에서 차지하고 있던 고위직을 박탈당한 채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후원으로 복권되어 총리가 되었으며, 1975년에는 당 중앙위원회의 부주석, 정치국 위원 총참모장이 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간 덩은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졌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였던 4인방(四人幇)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숙청된 후 비로소 그해 9월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의 동의를 얻어 복직되었다. 1977년 7월경 덩은 이미 고위직을 회복했으며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화궈펑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덩이 화궈펑보다 노련한 정치력과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화궈펑은 1980~81년에 총리직과 주석직을 내놓아야만 했고 이들 자리는 덩샤오핑 휘하의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자오쯔양[趙紫陽]이 정부 총리가 되었고 후야오방[胡耀邦]이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는데 두 사람 다 덩의 지도노선을 따랐다. 이때부터 덩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합의·타협·설득 등의 방법을 써서 중국의 정치·경제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중대한 개혁을 도모했다. 그는 경제 운영에 있어서 지방분권적인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효과적·통제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융통성있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농민들에게는 자신의 생산물과 이윤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을 지게 했는데, 그결과 1981년 이 정책이 시행된 이래 몇 년 안 되어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경제에 관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에 비중을 두었고 근면과 창의력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아 중국 발전의 선봉에 설 기술자와 경영자들을 양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기업체들을 중앙정부의 통제와 감독에서 벗어나게 했고, 공장 경영자들에게는 생산량을 결정하고 이윤을 추구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외정책에서는 서구와의 무역 및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고 중국 기업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허용했다.
덩은 당과 정부 내에서의 최고위직을 피했다. 그러나 강력한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있으면서 군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공산당 부주석이기도 했다. 그가 당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직위와 그의 주장은 권위가 있어서 1980년대 내내 중국의 주요 정책결정자였다. 1987년에 덩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직함으로써 정치국과 정치국 내의 막강한 상임위원회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개혁에 반대하던 많은 연로한 당 지도자들이 은퇴하도록 만들었으며, 1987년 후야오방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덩은 군사위원 주석직은 계속 맡고 있었으며 당내에서의 결정적인 권위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1989년 4월 민주화된 정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대의 세력 증대로 시위가 베이징으로부터 기타 도시로 번지기 시작하자 덩은 자신의 지도권에 대한 중대한 시련에 직면했다(→ 톈안먼 사건). 덩샤오핑은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을 지지하고 뒤이어 학생 지도자들과 시위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과 그들에 대한 처형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보였으나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위기를 잘 극복하여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임을 증명했다. 1992년 10월 12일에 개최된 제14회 전국대표대회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상쿤[楊尙昆] 등의 고위급 정치가들을 요직에서 퇴진시키고, 개혁파 주룽지[朱鎔基] 부총리 등을 선출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 새로운 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1994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덩은 1997년 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덩샤오핑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4년 8월 22일 중국 쓰촨성 광안현 셰시항 파이방촌에서 출생했다. 그는 격동의 20세기를 온전히 살아내고 1997년 2월 19일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베이징에서 93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백년 중국을 중원에서 살아낸 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그를 ‘백년소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항일무장투쟁부터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을 함께한 중국 공산당의 핵심인물이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가 평생 신념으로 삼은 칼 마르크스를 알게 됐다. 1921~1924년에는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1927년부터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부터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했다.
항일 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휘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으면서 정치인으로서 급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빛났던 시기는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고부터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끄는 디딤돌이자 징검다리가 됐다.
과거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을 줄여 부른 중공은 북한과 더불어 공산국가로 적대시했다. 지금은 아무도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모범적인 국가로 자본주의 국가에서보다 더 사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을 듣곤 했다.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의 중국을 이끈 지도자는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이 아니라 덩샤오핑이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인민의 나라를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인민의 나라를 부자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인민의 아들’로 인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즉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정치지도자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실현해 중국 경제 강국의 디딤돌이 된 덩샤오핑
시장경제에 대한 구상은 그를 10년간이나 고립시켰던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기인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정권에 불안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부인인 강청을 필두로 하는 사인방과 홍위병을 앞세워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극좌 운동을 벌였다. 당시 참신한 정치 개혁 세력으로 떠오른 덩샤오핑은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된다. 문화대혁명 기간 수없이 많은 희생과 중국공산당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중국의 운명을 시궁창에 빠뜨릴 뻔했던 문화혁명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쁜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던 그 사건을 두고 그는 ‘사람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우리들의 단점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 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정치에 복귀한 그는 1978년 5월경 주요 인재들을 서유럽 5개국으로 시찰 보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 연구를 철저히 하고 중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준비한 것이다. 매우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 이유는 100년, 200년에 걸쳐 서구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중국이 시장경제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인력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다시 그릇된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경제 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미국, 일본 등을 방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적국이지만, 시장경제를 알기 위해서 그 나라의 경제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에서 닛산 자동차의 기미쓰 공장을 견학한 후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노동 생산율은 중국 장춘 제 1 자동차회사의 수십 배에 이르는군. 이것이 바로 현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는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삼보주`(三步走)’ 목표를 세웠다. 경제 강국으로 가는 목표를 향한 세 발걸음이다. 우선 제 일보인 ‘원바오’는 ‘인민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초보적인 단계’이고, 제 이보인 ‘샤오캉’은 생활 수준을 중류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며, 제 삼보인 ‘대동사회의 실현’은 중국의 현대화를 실현하는 일이다. 덩샤오핑의 계획대로 중국은 지금 제 삼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후 100년을 내다보고, 정책을 실현할 때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후계자들에게 당부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초상화 앞에 선 중국 어린이들(초상화 왼쪽부터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마오쩌둥,덩샤오핑)
덩샤오핑은 1979년 말 미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지프니 부사장 등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만 있다는 견해는 정확하지 않소. 사회주의 국가에서 왜 시장경제를 할 수 없단 말인가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지요. 시장경제는 봉건사회 시대에 시작했던 것이므로,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과감한 경제 특구의 개발, 계획적인 시장경제의 성공적인 운영으로 중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1993년 아흔 살에 가까운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경제의 취약점인 부의 분배 문제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즉 발전한 후의 분배문제이다. 이것은 발전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움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만약 많은 재산을 소수만이 누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다면, 분배가 공평하지 못하게 되고 양극분화를 초래하기 쉽다. 장기적으로 이렇게 된다면 크나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적절한 방안을 세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혁명가로서 긴장감을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은 양극분화가 심화될 때 터지는 활화산과 같은 것이다.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자였다. 만년에 그는 말했다. “국가는 발전했다. 나는 부유한 나라의 한 공민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산주의 이상은 위대한 것이고, 사회주의는 경애로우며, 사회주의를 위해 일평생 투쟁하는 것은 값어치가 있다.”
덩샤오핑이 가장 빛난 시점은 바로 홍콩 반환 시점이 돌아올 때였다. 영국은 자본주의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면서, 영토는 반환하되 홍콩 관리는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며 중국 정부에 중재안을 냈다. 이 때 덩샤오핑은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결과적으로 홍콩은 무사히 중국 땅이 되었다. 1842년 8월 29일 청나라가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에서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에게 조차되었다. 150년의 시간이 지나고, 홍콩 반환 시점이 가까워지자 영국이 사전 협상을 위해 1979년 베이징을 방문, 매리 매클레호스 홍콩 총독을 만났을 때, 덩샤오핑은 ‘일국양제’ 구상을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영국이 조차기간이 만료된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을 관리하고자 한 이유는 이미 홍콩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만약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차선책으로 토지 매각 등을 통하여 투자한 자본 회수를 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홍콩은 자멸할 것이 뻔하다. 이 때 덩샤오핑은 ”1997년 7월 1일 반드시 홍콩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 주권국가로의 일이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인민들은 우리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단, 홍콩은 자체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사회주의를 실시할 것이다. 당신들은 돌아가서 투자자들을 안심시켜라.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한 나라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상반된 두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구상 즉 ‘일국양제’이다.
덩샤오핑은 1984년 12월 19일 영중 홍콩 문제 해결에 관한 연합성명 서명식에서 당시 영국 총리인 마가렛 대처와 악수를 한다. 철의 여인과 강철 사나이의 만남이다. 훗날 대처는 일국양제 구상은 덩샤오핑의 천재적 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1986년 10월 덩샤오핑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접견했다. 이제 덩샤오핑의 소원은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돌아오는 홍콩 땅을 살아서 밟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룰 수 없었다. 반환 시점을 불과 5개월을 남겨두고 덩샤오핑은 1세기를 살아낸 거인으로 부유한 나라인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장국영이나 유덕화, 임청하와 같은 홍콩 배우들이 인민복을 입고 다니는 것인가 하는 우려감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홍콩은 여전히 자본주의 홍콩으로서 발전하고 있다.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후계자를 키우기 위해 모범을 보인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노 간부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82년에 샤오핑은 중앙고문위원회를 만들어 노 간부들이 정치에서 물러나 조언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 덩샤오핑도 초대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을 맡아 5년 후 퇴임했다. 이 과도기를 통해 정권유지를 위한 제 2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위대한 지도자라 일컬었던 마오쩌둥 역시 권력 앞에서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는 퇴임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나이가 많으므로 퇴직하겠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발굴해내야 합니다. 고문위원회의 설립목적은 바로 노 간부가 젊은 지도자들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노 간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새로운 후계자를 선택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중국과 가까이 있는 북한 지도자들은 덩샤오핑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문화대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바로 당에 위기를 가져 올 수 있는 지도자 간부들의 종신제였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덩샤오핑은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라 말할 수 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10년간 존속하고 해산했다. 노 간부들은 고문으로서 조언은 가능하지만, 정부 정책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이것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결국 덩샤오핑의 솔선수범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 권력이 인민의 손에 의해 선택된 인민의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1989년 11월 9일 덩샤오핑 은퇴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건강한 삶을 살았다. 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고 수영을 즐겼으며, 지인들과 카드놀이를 즐겼다. 서재 책상 밑에서 손자들이 뛰어 노는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고, 인민들과 함께 자신을 닮은 나무를 끊임없이 심었다. 대가족이 모인 집안에서 덩샤오핑은 식구들이 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에 관한 많은 서적이 있지만 대표작으로는 자신이 직접 감수한 3권으로 출간된 <덩샤오핑 문선>이다. 이 책은 ‘전 세대 혁명가들이 후세대에 보내는 간절한 기대’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8월 13일 쓰촨성 광안에서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덩샤오핑 동상 개막식 연설에서 이렇게 덩샤오핑을 추모했다. “덩샤오핑 동지의 일생은 민족의 해방과 국가의 부강,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한 빛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중국의 혁명과 건설, 개혁을 위해 영원히 남을 역사적 공헌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숭고한 사상과 인품, 위대한 인격적 매력을 갖춘 분으로, 우리들에게 고귀한 정신적 자산을 남겨 주었다. 오늘, 우리가 덩샤오핑 동지를 가장 훌륭하게 기념하는 것은 그가 개척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끊임없이 추진 발전시키는 것이다.”
중국 덩샤오핑(Deng Xiaoping) 사망(1997.02.19)-매일신문, 2008.02.19.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480&yy=2008
중국의 정치가 덩샤오핑 사망(1997.02.19)-네이버뉴스, 2008.02.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8&aid=000194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