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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94.02.22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중국 상해에서 암살당함

루지에나 2013. 4. 3. 13:37

1894.02.22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중국 상해에서 암살당함

 

 

 

 

 

 

1884.12.04   갑신정변 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2046

 

 

 

 

 


    185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영향을

    받고 개화 사상에 눈뜨게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새 문물을 살펴보았다. 
    1884년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 내각을 조직했으나
    청 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지고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옥균을 죽인 홍종우는 정부가 보낸 자객이다.

 

 

 

 

김옥균[ 金玉均 ]

 

1851(철종 2)∼1894(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개화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충청도 공주 출신.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양부 병기가 강릉부사로 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당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박규수(朴珪壽) 등에 의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51(철종 2)-1894(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개화운동가.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외치며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글씨는 ≪근묵≫에서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장에 진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 직후에 ≪기화근사 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당시 청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3천 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해 갔다. 임오군란을 진압하여 민비정권을 재수립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청군을 그대로 서울에 주둔시킨 채,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 위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자행하였다.

 

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비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여 김옥균 등 개화당을 박해하였다.

 

임오군란 후 1882년 9월 그는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 治道略論≫을 저술하였다.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M{{%106}}llendorff, P.G.)와 민비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가 그가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었다. 이로써 국채 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 4월 귀국하였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도일 과정에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그가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및 민비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그는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5월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킨 3천 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다. 1884년 8월 마침내 청·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그는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 30일 서울에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였다. 그는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 개입을 막는 데 이용하기 위해 조선군 1,000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의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날 밤으로 민비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 : 국왕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는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그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였다. 6일 오전 9시 경에 국왕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공포하였다. 이 날 오후 3시에는 국왕도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 하였다.

 

그러나 청군 1,500명은 이 날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 개입을 시작해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 공격해 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 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였다. 그러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도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처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그를 박해하였다.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1888년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 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민비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4개월 뒤에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자 이듬 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에 의해 죄가 사면, 복권되었다.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저서로는 ≪기화근사≫·≪치도약론≫·≪갑신일록 甲申日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嗚呼古筠居士(閔泰瑗, 1925), 朝鮮之偉人(開闢社, 1926), 金玉均傳 上(古筠紀念會, 1944), 甲申政變과 金玉均(閔泰瑗, 國際文化協會, 1947), 開化黨硏究(李光麟, 一潮閣, 1973), 金玉均의 開化思想(愼鏞廈, 東方學志 46·47·48合輯, 1985).

 

/네이트 백과사전

 

 

 

 

 

갑신정변, 그러나 삼일천하


1884년 음력 10월 17일 저녁, 낙성식이 열리던 우정국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피해 뛰어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급히 빠져나왔다. 이들은 서재필 휘하 사관생도들을 경우궁(지금의 서울 계동 현대사옥 뒷자리)으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뒤 대궐로 향했다. 고종을 만난 이들은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하니 피할 것을 요청했다. 고종명성황후는 급히 경우궁으로 몸을 피했다. 곧 일본군이 경우궁 외곽을 에워쌌다. 그 뒤 이들은 왕명으로 윤태준, 조영하, 민태호, 이조연 등 수구파들을 불러들여 살해했다.

 

그렇게 수구파 수뇌들을 제거한 개화파는 날이 밝자 대내외에 새 정부의 발족을 알렸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앉히고, 홍영식은 좌의정에,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 김옥균은 호조참판을 맡는 등 국가 중추기관을 장악한 뒤 혁신적인 새 정책을 발표했다.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모셔오고 조공을 폐지하는 등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확립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 했으며, 문벌을 폐지하고 지조법을 개혁하는 등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새로운 제도의 도입보다 기존의 제도에 개혁적 인물을 배치하려는 한계가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3일 만에 폐기되고 만다. 예상외로 청군이 신속하게 개입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당시 청군을 이끌던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전쟁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한발 물러섰다. 수구파와 합세한 청군이 고종의 일행이 환궁한 창덕궁에 진입하자, 일본군의 동원과 자금의 차관을 약속했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그간의 약속을 저버리고 철수하려 했다. 개화파가 지휘하는 군대가 청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근대국가를 꿈꿨던 이들의 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온건파인 홍영식 등은 왕에게 투항하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재기를 꾀하기 위해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향했다. 원세개와의 친분 등을 믿고 고종을 따랐던 홍영식 일행은 청군에게 잡히자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죽었고, 다케조에를 따랐던 김옥균 등은 마침 인천항에 입항해 있던 일본 배에 올라타 조선을 탈출할 수 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청년 엘리트로 정계에 진출


“어떻게 하면 구(舊)조선을 파괴하고 신(新)조선을 건설할꼬?”라며 늘 고민하던 김옥균의 혁명적 시도는 그렇게 좌절되었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안동김씨 가문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856년 서울 북촌 화개동에 살던 오촌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병기는 강원도 금성군수, 양양부사, 강릉부사 등을 지낸 인물로 어린 옥균은 유족한 환경 속에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22세 되던 해 알성시에 장원급제했고, 그 후 사헌부 감찰, 지평,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을 거치며 청년 엘리트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 무렵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며 개화사상을 배우는 장소였다. 김옥균은 이 사랑방의 주요 구성원으로 박규수를 비롯해 유대치, 오경석 등의 영향을 받으며 젊은 개화사상가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로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선을 건설해나갈 것을 계획했다. 이후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모임을 만들어 조선의 장래를 토론했고, 김홍집, 이동인,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등을 해외로 시찰 보내 개혁에 동참하도록 적극 유도했다. 또한, 승정원 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 및 개화파의 세력 확대에 힘썼다.

 

 

수구파의 공세에 급진적 개혁 시도


1882년에는 서광범과 함께 직접 일본 시찰을 떠나 당시 일본 재야 정객들과 면담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신문물을 접했다. 그러나 귀국해보니 임오군란 뒤 정권을 잡은 수구파와 이들 뒤에 있는 청나라의 압력에 개화파가 점점 내몰리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에서 추천한 재정 고문 묄렌도르프는 사사건건 김옥균과 대립했다.

 

특히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방안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의 주조를 주장했던 반면 김옥균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이에 반대하고 일본에서 외채를 빌려 오겠다고 했다. 고종으로부터 위임장까지 받아 일본에 갔지만 묄렌도르프와 수구파의 음모로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개화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 무렵 일본은 자주성이 강한 개화파와 손을 잡는 것보다 그 비용으로 군비를 확장해 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수구파의 압력에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개화파들이 선택한 길은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마침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이 병력을 빼가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나 수구파 정권을 흔들어댔다. 개화파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1,500명이나 남아 있는 청군이었다.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개화파를 부추겨 청과 연결된 수구파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김옥균은 거사 5일 전 고종과 독대하며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智謀)에 맡기겠다”는 밀지까지 받았다.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들과 상인들의 힘을 조직할 줄 몰랐고 단지 왕권에 의지해 위로부터 개혁을 시도했으며, 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일본군의 힘에 의존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는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개입을 강화해주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는 이들에게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을 씌웠다.

 

 

고단한 망명생활 끝에 암살되었으나 일제에 이용당해


선창 밑에 숨은 지 3일 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일본에서 고단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도 그를 홀대해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을 시키기도 했다.

 

1886년 고종에게 올린 편지에서 김옥균은, 청국과 일본은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나라로 조선은 결코 이들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밖으로는 구미와 교제에 힘쓰면서 안으로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미 조선 정부에게 그는 외국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대역죄인일 뿐이었다.

 

1894년 김옥균은 마지막 승부수로 당시 청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홍장과의 담판을 위해 청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조선에 넘겨진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었으나, 이듬해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일제는 김옥균의 죽음을 교묘히 이용했다. 생전의 대우와 달리 김옥균의 죽음에 애도하고, 그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애쓰다 희생됐다고 칭송했다. 또한, 암살의 배후에 청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청에 대한 침략전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 김옥균이 심취했던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왜곡해 일본의 대륙침략에 철저히 이용했다. 삼화주의란 한·중·일 삼국의 공존과 화맹을 통해 서양 침략에 대응하고 아시아를 부흥시키자는 주장을 말한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의 명분을 삼화주의에서 찾고, 김옥균을 동양평화의 희생물로 우상화시켰다.

 

 

 

 

윤희진 / 역사저술가
<한국사 인물 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 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발행일  2011.03.04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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