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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732.02.22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출생

루지에나 2013. 4. 3. 13:37

1732.02.22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미국 초대 대통령 출생

 

 

 

 

 

1799.12.14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2311

 

 

 

 

 

 

Gilbert Stuart Williamstown Portrait of George Washington.jpg

 


“도덕성은 대중정치의 원천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1796년 9월17일 대통령 3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발표한 ‘고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학연·지연을 고려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침략전쟁을 거부하는 등 도덕정치를 구현한 인물이었다. 장기 집권이 민주주의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그는 연임 제한 규정이 없었음에도 기꺼이 권력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워싱턴은 1789년 2월4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23년 전 오늘이다. 이복형제의 소개로 군인이 된 그는 대(對) 영국 독립전쟁(1775~1783) 당시 대륙 총사령관을 맡아 승리를 이끌었다. 이것이 초대 대통령 당선의 발판이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가장 먼저 챙긴 일은 통합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 지역정서를 토대로 한 파당정치가 심했는데 워싱턴은 고른 인재 기용을 통해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 덕에 연방정부는 지역과 출신 성분을 막론하고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시민의 깊은 믿음은 미국 번영의 초석이 됐다.

워싱턴은 1799년 12월14일 급성후두개염(추정)으로 숨을 거뒀다. 미국 국민들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양병훈 기자/한국경제

 

 

 

 

 

 

 

워싱턴[ George Washington ]

1732. 2. 22(구력 2. 11) 미국 버지니아 웨스트모얼랜드~1799. 12. 14 버지니아 마운트버넌.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1752년 이복 형에게 마운트버넌의 부동산을 물려받으며 어린 나이에 대지주가 되었다. 이복 형이 죽은 후 워싱턴은 버지니아 남부의 부대장이 되어 군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워싱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23세 때 버지니아 식민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버지니아 식민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전역했다. 워싱턴은 전역 후 과부였던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하고 대지주로서 만족스런 생활을 해나갔다. 또한 의회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페어팩스 군 치안판사로도 일했다.

 

1764년 새로운 영국 내각이 식민지에 대해 새로운 과세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났다. 워싱턴은 제1차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대표 가운데 하나로 선출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정치 무대에 들어섰다. 이후 제2차 대륙회의에서도 버지니아의 대표로 뽑힌 그는 아메리카 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총사령관이 된 이후 워싱턴은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냈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암울한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1778년 아메리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워싱턴은 제헌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8년 동안 미국의 대통령으로 일했으며 3번째 임기를 거부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워싱턴의 어린시절과 젊은시절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아버지는 오거스틴 워싱턴이었고, 어머니는 오거스틴의 후처인 메어리 볼이었다. 워싱턴 집안을 아메리카에 이주시킨 사람은 조지의 증조부 존 위싱턴으로, 그는 청교도혁명으로 재산을 잃자 1657년 가족을 이끌고 영국 노샘프턴셔 주에서 버지니아 식민지로 건너왔다. 부지런하고 야심만만한 오거스틴은 버지니아에 많은 땅을 얻고 공장을 짓는 한편 철광 개발에도 관심을 보였다. 오거스틴은 전처한테서 네 아이를 낳았고, 후처한테서 여섯 아이를 낳았으며, 1743년 4월 12일 죽었다.

 

조지 워싱턴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는 7~15세에 불규칙하게 학교에 다녔으나, 책보다는 야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담배 재배와 가축 사육법을 터득했고, 또한 이무렵에 익힌 측량 기술 덕분에 10대 후반에는 측량 기사로 일하면서 버지니아 동부의 저지대는 물론 서쪽의 미개척지를 널리 여행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자 11세의 조지는 이복 형 로렌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로렌스는 지역 유지인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의 딸 앤(낸시) 페어팩스와 결혼했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10.12㎢의 땅에 마운트버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지는 주로 이곳에서 로렌스와 함께 살면서, 좀더 넓고 교양 있는 세계와 접촉하게 되었다. 영국에 유학했고 해군에 복무한 적이 있는 로렌스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형수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751~52년은 워싱턴의 생애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복 형 로렌스는 결핵에 걸려 1751년 바베이도스 섬으로 요양하러 떠나면서 조지를 데려갔다. 조지가 현재의 미국 밖으로 여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로렌스는 1752년 7월 죽으면서, 딸 새러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 조지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새러는 2개월 뒤에 죽었고, 조지는 20세의 나이에 버지니아 주에서 가장 훌륭한 땅의 주인이 되었다.

 

 

워싱턴의 초기 군대경력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로버트 딘위디 총독 대리는 조지 위싱턴을 버지니아 남부 지구 부대장으로 임명했다(1752. 11). 이듬해 그는 노던 곶과 동해안 지구 부대장이 되었다. 이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오하이오 강 연안을 놓고 충돌이 잦았다. 1753년 10월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군 진지로 떠났다. 오하이오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쫓아내겠다는 딘위디의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은 혹독한 날씨와 거친 황무지 속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끝에 이리 호에서 남쪽으로 32㎞ 떨어진 르뵈프 요새(지금의 펜실베이니아 주 워터퍼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사령관은 오하이오를 차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워싱턴은 1754년 1월 16일 윌리엄스버그에 도착하자마자 보고서를 썼다. 딘위디는 프랑스인들의 위협이 심각하다는 것을 국왕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워싱턴의 보고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총독은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그는 조슈아 프라이를 연대장으로 임명하고 워싱턴을 중령으로 임명하여, 신병을 모집하게 했다. 로렌스 워싱턴이 포토맥 강과 오하이오 강 상류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만든 오하이오회사는 오늘날의 피츠버그에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다. 딘위디는 이 기지를 강화하기 위해 워싱턴을 파견했다. 1754년 4월 워싱턴은 160명의 부하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프랑스군은 이미 요새를 점령하고 뒤켄 요새로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워싱턴은 프랑스군 기지에서 약 64㎞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여, 오늘날의 펜실베이니아 주 컨플루언스 근처에 기지를 세웠다. 그는 이곳을 발판으로 삼아 30명쯤 되는 프랑스군 파견대를 기습하여, 파견대장 쿨롱 드 쥐몽빌과 9명의 병사를 죽이고 나머지를 포로로 잡았다. 이리하여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마지막 국면이 시작되었다. 연대장으로 승진한 워싱턴은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상당히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7월 3일 병력이 2배나 많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군은 무장해제를 당했으나 버지니아로 귀환했다.

 

1755년 2월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버지니아에 도착했다. 뒤켄 요새 공격을 맡은 브래덕은 워싱턴을 부관으로 삼았다. 이로써 워싱턴은 새로운 기회와 책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브래덕의 군대는 7월 9일 복병을 만나 참패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이 전투에서 워싱턴은 남다른 냉정함과 결단력,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침착성을 보여주었다. 워싱턴은 열병에 걸렸는데도 용감하게 부대를 지휘했고, 부대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활약 덕분이었다. 이 싸움에서 브래덕은 치명상을 입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은 부대를 이끌고 퇴각한 뒤, 23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식민지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7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거의 640㎞나 되는 국경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의회는 그에게 별로 호의적이 아니었다. 건강이 나빠진 워싱턴은 1757년 마운트버넌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봄에 건강이 회복되자 버지니아 식민지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존 포브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뒤켄 요새로 다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존 포브스는 브래덕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 레이스타운에서 서쪽으로 가는 새로운 통로를 개척했다. 늦가을에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뒤켄 요새를 불태웠고, 포브스는 그 자리에 피트 요새를 세웠다. 얼마 전에 버지니아 식민지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워싱턴은 명예 준장의 계급장을 달고 전역할 수 있었다.

 

 

워싱턴의 결혼과 농장 생활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그는 전역한 직후에 마사 댄드리지와 결혼했다(1759. 1. 6). 마사는 그보다 한 살 위이고, 남매가 딸린 미망인이었다(전 남편은 버지니아의 재산가로 이름난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임). 워싱턴과 마사 사이에 낭만적인 사랑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조화를 이루었고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마사는 훌륭한 주부였고 상냥한 벗이었으며 품위 있는 안주인이었다. 마사와의 결혼으로 워싱턴은 수많은 노예와 윌리엄스버그 근처에 있는 60.7㎢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워싱턴에게는 재산보다 두 의붓자식이 더 중요했다. 의붓아들 존 파크(재키) 커스티스와 의붓딸 마사 파크(패치) 커스티스는 어머니가 워싱턴과 재혼했을 때 각각 6세와 4세였다. 재키는 전쟁 때 자식 4명을 남기고 죽었는데, 워싱턴은 그 가운데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입양했다. 그 자신은 자식을 가지지 못했다.

 

결혼한 뒤, 워싱턴은 요크 강 연안에 있는 저택에서 마운트버넌뿐만 아니라 커스티스의 토지까지 관리했다. 그는 늘어난 땅을 여러 개의 농장으로 나누어 각 농장에 감독을 두었지만 매일 꼼꼼하게 작업을 감독했으며, 때로는 손수 노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혁명 직전에 그는 대지주의 의무와 즐거움에 몰두해 있었고, 매년 몇 주일씩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의회에 출석했다. 1760~74년에는 페어팩스 군 치안판사로도 일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 농장주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의 농장은 물방앗간과 대장간, 벽돌 가마와 숯 가마를 갖고 있었고, 그의 양어장은 농어와 청어 같은 생선을 공급했으며, 그의 영지에는 목수와 석공, 통만드는 사람, 직공, 제화공들이 살고 있었다. 요컨대 그의 영지는 자급자족 공동체였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혁명 이전의 정세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전쟁 빚과 높은 내국세,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군사 비용에 짓눌린 영국 내각은 1764년 식민지에 대하여 새로운 과세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워싱턴은 나라 문제에 거의 무관심했고,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1763년 영국 정부가 포고령을 내려 앨러게니 강 너머에 식민지 개척을 금지시키자, 오하이오사와 미시시피사를 비롯한 서부 개척 회사에 참여하고 있던 워싱턴은 조바심을 냈다. 그는 1765년 5월 패트릭 헨리가 제출한 인지세법(Stamp Act) 반대 결의안에 찬성했고, 그 직후에는 영국의 토리당 내각에 대항하는 식민지 휘그당의 대의명분을 지지했다. 1769년 5월 총독이 식민지 의회를 해산하자, 그는 영국 상품 수입 거부 결의안을 기초한 모임에 참석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대다수 식민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깨뜨릴 필요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1773년 12월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서부에서 동부로 눈을 돌렸고 본국과 식민지 관계의 위기를 분명히 인식했다.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1774년 5월 대륙회의의 소집을 요구했을 때,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여 결의안에 서명했다. 버지니아 의회는 워싱턴을 제1차 대륙회의에 보낼 7명의 대표 가운데 하나로 선출했다. 워싱턴은 이제 온건파가 아니라 급진파로 알려져 있었고, 영국 국왕에게 계속 탄원해도 굴욕적인 거부를 당할 것이 뻔하다는 이유로 탄원서 제출에 반대했다. 1774년 9월 5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대륙회의를 통하여 그는 전국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륙회의는 마지막 수단으로 무력 저항에 호소할 수도 있다는 '서퍽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국 국왕의 태도는 더욱 완강해졌다. 1774년 11월 버지니아로 돌아온 워싱턴은 의용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1775년 3월에는 제2차 대륙회의 대표로 다시 뽑혔다.

 

 

미국독립전쟁 아메리카 혁명군 총사령관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제2차 대륙회의가 1775년 5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을 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2만 명 남짓한 아메리카군을 지휘할 총사령관을 뽑는 것이었다. 6월 15일 워싱턴이 총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능력과 명성에서 그만한 인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거래의 결과였다. 뉴잉글랜드가 버지니아의 보호를 약속받는 대가로 총사령관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그는 총사령관이 되자마자 특유의 결단력과 정력을 발휘해 지원병을 조직하고 식량과 탄약을 모았다 (→ 미국독립전쟁).

 

그는 1776년 3월 4일 밤에 보스턴 시가지와 항구가 내려다보는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고, 타이콘더로가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들을 배치했다 (→ 보스턴 포위전). 영국 해군사령관은 혁명군을 그 요새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보스턴 항구에 머물 수 없다고 선언했으나,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장군은 3월 17일 보스턴에서 철수했다.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낸 뒤 워싱턴은 뉴욕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남쪽으로 달려갔다.

 

첫 대결에서는 워싱턴이 승리했지만, 혁명군은 그후 5년 동안 패배를 거듭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전략가는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자주 실수를 저질렀고, 1776년의 롱아일랜드 전투에서는 군대 전체가 포로로 잡힐 뻔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결점은 자신의 판단보다 휘하 장군들의 판단을 더 존중하는 경향이었다.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을 때면 항상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그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담하고 저돌적이었지만,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소극적인 지연 전술을 자주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강인한 성격에다 군인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능력이 있었으며, 정력적 활동과 풍부한 상식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워싱턴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규율에 엄격했다는 점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혁명군 병사들은 걸핏하면 병에 걸렸고, 탈영할 기회만 노리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세 지역에서 모인 병사들은 서로 경계하고 시기했다. 워싱턴은 비겁하고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한 병사들을 엄하게 징계하는 한편, 병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대륙회의에 요구하여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76년 4월 이즈리얼 퍼트넘이 지휘하는 약 9,000명의 병력을 롱아일랜드의 브루클린 고지에 배치했다. 이곳은 이스트 강의 영국 함대에게 퇴로를 끊길 수도 있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는 독립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대륙회의에 참석하느라 5월 필라델피아에서 2주일을 보낸 뒤, 하우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영국군은 스테이튼 섬에 진을 치고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뒤, 1776년 8월 22일 그레이브젠드 만을 건너 롱아일랜드에 상륙했다. 4일 뒤 하우 장군은 동생인 리처드 하우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뉴욕 시로 보내어 양동 작전을 펴면서, 방비가 허술한 혁명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하우 장군은 혁명군 진지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꾸물거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그 틈을 타서 워싱턴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이스트 강을 건너 맨해튼으로 옮겨갔고, 영국군은 맨해튼 섬의 저지대에 기습 상륙하여 혁명군을 몰아냈다. 워싱턴은 여러 번 포로로 잡힐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허드슨 강 연안에 있는 요새 2개를 빼앗겼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수천 명의 병력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뉴저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델라웨어로 후퇴하는 동안 병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영국에 대한 무력 저항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에게는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워싱턴은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두어, 아메리카의 희망과 활력을 되살렸다 (→ 트렌턴과 프린스턴 전투). 델라웨어 서쪽에 진을 친 워싱턴은 남은 병력 6,000명을 총동원하여 트렌턴과 프린스턴을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양쪽 날개를 맡은 부하들이 그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워싱턴은 1776년 12월 25일 밤에 약 2,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트렌턴으로 진군했다. 그는 헤센 출신의 독일 용병부대를 기습하여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용병대장 요한 랄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콘월리스 장군이 8,000명을 이끌고 트렌턴으로 달려왔지만, 워싱턴은 콘월리스와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늙은 여우를 잡기'로 결정했다.

 

밤새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길은 꽁꽁 얼어붙었다. 진지를 몰래 빠져나온 워싱턴은 콘월리스 부대 뒤로 우회하여, 새벽에 프린스턴에 있는 영국군 3개 연대를 기습했다. 영국군은 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으며, 워싱턴은 많은 전리품을 갖고 뉴저지의 모리스타운에 있는 진지로 개선했다. 이 승리는 모든 아메리카인과 외국 동조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봄에는 지원병들이 혁명군 진지로 몰려왔다.

 

1777년은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영국의 존 버고인 장군이 새러토가에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에게 투항한 해였다. 필라델피아가 점령되자 대륙회의는 펜실베이니아 내륙으로 피난했고, 저먼타운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을 기습하려다가 실패한 워싱턴은 밸리포지에서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맨발에 거의 벌거벗은 상태인 혁명군은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게다가 일반 대중은 날로 비난의 소리를 높였고, 대륙회의는 그를 변변히 지원하지도 못하면서 공연한 트집을 잡곤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워싱턴은 겨울 내내 밸리포지를 고수했다.

 

워싱턴의 정적들은 그가 가장 허약해진 이 순간을 노려 그에 대한 적개심을 배출시켰다. 아일랜드계로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다가 혁명군 감찰 장관이 된 토머스 콘웨이는 토머스 미플린, 찰스 리, 벤저민 러시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워싱턴을 총사령관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 음모에 동조한 대륙회의의 일파는 전쟁 위원회를 개편하여 워싱턴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다. 전쟁 위원회 의장은 게이츠 장군이 맡았고, 그의 참모장인 제임스 윌킨슨이 간사가 되었다. 워싱턴은 대륙회의 내의 적개심을 잘 알고 있었고, 매사추세츠의 벤저민 러시와 제임스 로벨이 퍼뜨리는 중상모략, 영국 첩자들이 아메리카 언론에 발표한 날조기사, 북부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남부의 버지니아 출신인 그에게 품고 있는 시기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1777년 11월 9일 사건 전모를 알고 있다는 서신을 윌킨슨에게 띄움으로써 콘웨이 일당의 음모를 무산시켰다.

 

1778년 봄 아메리카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결과 전쟁의 양상은 급변했다. 필라델피아에 주둔한 영국군은 프랑스 함대에 봉쇄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뉴욕 시로 철수했다. 워싱턴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6개 여단을 이끌고 서둘러 진격하여, 6월말에 헨리 클린턴(하우 장군의 후임자) 부대 주둔 지역과 저지 해안 사이에 도착했다. 그결과 6월 28일에 몬머스 전투가 벌어졌다 (→ 몬머스코트하우스 전투). 워싱턴은 빈틈없는 전략을 세워 공격했지만, 느닷없이 후퇴 명령을 내린 찰스 리의 배신 때문에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1778년 7월에 샤를 엑토르 에스탱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자 클린턴이 이끄는 영국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결정타는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 요크타운 포위전). 1780년 드 로샹보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도착하자, 워싱턴은 남부에 있는 콘월리스나 뉴욕의 클린턴에 대한 공격을 도와달라고 프랑스 해군 제독 드 그라스에게 요구했다. 8월에 프랑스 제독은 체서피크 만이 작전 지역으로 더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로부터 1주일도 지나기 전인 1781년 8월 19일 위싱턴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델라웨어 만에서 배를 타고 9월 14일 버지니아 주 윌리엄스버그에 상륙했다. 콘월리스는 7,000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요크타운으로 후퇴하여 참호를 팠다. 워싱턴이 지휘하는 연합군(5,500명의 혁명군, 3,500명의 버지니아 민병대, 5,000명의 프랑스 정규군으로 이루어짐)은 맹렬한 포위 공격을 퍼부었고,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항복했다. 워싱턴의 통솔력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전투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워싱턴은 1781~82년 겨울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에 참석했고, 1783년 4월 허드슨 강 연안의 뉴버러에 있는 사령부로 돌아왔다. 혁명군은 클린턴이 뉴욕에서 철수한 1783년 11월 25일 뉴욕에 개선했다. 워싱턴은 12월 4일 측근 장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12월 23일 아나폴리스에 있는 메릴랜드 상원에서 대륙회의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2월 24일 새벽에 아나폴리스를 떠나 밤이 되기 전에 마운트버넌의 집에 도착했다. 그후 4년 동안 워싱턴은 자신의 영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전쟁 때문에 그는 땅을 돌보지 못했고 수출이 중단되었으며 지폐 가치의 하락 때문에 모두 3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재산을 복구하는 데 성공하여, 영지에서 매년 들어오는 수입이 1만 달러 내지 1만 5,000달러에 이르렀다.

 

 

미국독립전쟁 혁명 이후의 정세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1783년 이후 미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을 보면서, 워싱턴은 미국의 '확고한 단결'을 위해서는 좀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연방안을 지지했고, 여러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단결심을 부추겼다. 포토맥 강 항행 문제에 관하여 버지니아와 메릴랜드가 어떤 합의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 대표자들이 1785년 봄에 마운트버넌에서 만났는데, 이 모임에서 연방 대표자 회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워싱턴은 모든 주의 대표자들이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 모여 '미국의 요구에 알맞는 연방정부 헌법을 만들자'는 제안을 지지했다.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꺼렸지만, 결국 버지니아 주 대표로 뽑혔다.

 

워싱턴은 5월 13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다음날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4개월 동안 그는 제헌회의를 주재했고, 그가 갖는 위엄은 회의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제헌회의가 만든 헌법이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더이상 미루다가는 나라가 분열하여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자신의 생각과 함께 패트릭 헨리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헌법 사본을 보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13개 주에서 헌법이 비준되었다. 나라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은퇴하여 사생활을 즐길 작정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초대 대통령 감으로 생각했다. 정계는 헌법 비준을 둘러싼 갈등으로 강력한 연방정부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와 그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 두 당파의 존경을 동시에 얻을 수 있고 또한 유럽 각국으로부터 신생 공화국에 대한 신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워싱턴뿐이었다. 1789년초 선거인단은 만장일치로 그에게 표를 던졌고, 그는 마지못해 대통령직을 수락했다. 4월 16일 그는 마운트버넌을 떠나 뉴욕에 도착하여 4월 30일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식은 오늘날 워싱턴 동상이 서 있는 자리와 가까운 월스트리트에서 열렸다. 그는 로버트 리빙스턴 대법관 앞에서 취임선서를 한 뒤 의회에서 취임연설을 했다.

 

 

워싱턴 행정부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1789년 4월 30일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8년 동안 미국을 다스린 워싱턴 행정부의 특징은 신중함과 조직적인 정확성, 그리고 분별있는 판단이었다. 워싱턴은 첫번째 내각에 국무장관에 토머스 제퍼슨, 재무장관에 알렉산더 해밀턴, 국방장관에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 에드먼드 랜돌프를 각료로 임명하여 두 정파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해밀턴을 특히 신임하여 미국 국립은행 설립 법안을 지지했고, 1793년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시작했을 때에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해밀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공화파의 제퍼슨과 연방파의 해밀턴 사이에는 불가피한 충돌이 일어났고, 제퍼슨은 워싱턴의 만류를 뿌리치고 1793년말 사임했다. 1794년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군이 위스키 반란을 진압하고 존 제이가 영국에 가서 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워싱턴은 더욱 연방파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국민의 요구에 못 이겨 1792년 2번째 대통령 임기를 맡기로 동의했고, 선거인단은 다시 만장일치로 그를 제2대 대통령에 뽑았다. 그러나 마지막 4년 동안 그는 심한 적개심에 시달렸다. 그에 대한 적의는 제이 조약의 내용이 발표되어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하원은 대통령에게 그 조약에 관한 지시와 통신 내용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외교 문제로 상원과 충돌한 워싱턴은 이것을 거부했다.

 

 

워싱턴의 은퇴

아메리카 식민지군 장군, 미국 독립전쟁(1775~83) 당시의 혁명군 총사령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97).

 

체력의 저하를 느끼고 반대파의 무례한 처사에 분개한 워싱턴은 3번째 임기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1796년 9월 19일 감동적인 〈고별사 Farewell Address〉를 발표하여 애국 충정으로 가득 찬 은퇴의 뜻을 밝혔다. 1797년 3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간 그는 생애의 마지막 2년 반을 가족과 농장 경영 및 노예 관리에 바쳤다. 1799년 12월 12일 그는 말을 타고 눈보라를 맞으며 돌아다니다가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심한 후두염에 걸렸다. 온갖 치료법을 다 써보았지만 그의 체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워싱턴은 "나는 이제 곧 죽지만, 가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차분하게 종말을 맞이했다. 그는 비서에게 장례식에 관한 지시를 내린 뒤, 12월 14일 오후 10시에 눈을 감았다. 이 소식은 이튿날 아침전국에 알려졌고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하원은 존 마셜의 제의에 따라 "워싱턴은 전쟁에서도 제1인자였고, 평화에서도 제1인자였으며, 동포들의 마음 속에서도 제1인자"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Al. Nevins 글

 

 

 

/네이트 백과사전

 

 

 

1789.4.30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1789년 4월 30일 뉴욕, 미국 임시정부의 청사 페더럴 홀에서 세계 역사상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당선자 조지 워싱턴이 오른손을 성경 위에 올려놓았다. 뉴욕 재판소장 로버트 리빙스턴이 물었다. “당신은 미국의 대통령직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미국의 헌법과 국민의 권리를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까?” 워싱턴은 대답했다. “예, 엄숙히 맹세합니다.”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닌 임기가 정해져 있는 세계 최초의 국가 원수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은 세계 역사상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계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국가 원수가 된 사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민주적 공화정이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에 한한 것이었다. 이 취임식이야말로 대통령 중심제로 대표되는 현대 정치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참고가 될 만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워싱턴 대통령에게 막막했다. 대포와 총 앞에서는 의연했던 장군이 취임 연설을 하면서는 어느 때보다 떨고 있었다. 연설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불빛 앞에서 나는 나의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불빛은 나에게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이에 나의 개인적 보수는 사절하겠습니다. 업무상 따르는 비용도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실질 경비로 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지 워싱턴의 미 합중국 초대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는 우편엽서

 

 

 

이제 막 출발선상에 선 미국은 조지 워싱턴 같은 리더십을 원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독단적이지 않았고, 주위의 의견을 듣고 포용할 줄 아는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정직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였다. 바야흐로 미국과 조지 워싱턴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만약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봉건적 왕정이 오히려 옳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역사의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택한 것이 그만큼 현명했음을 말해주는 결과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고난의 어린 시절, 항상 배우는 자세의 노력파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린 시절의 조지 워싱턴은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11세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이기적이었다.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은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번째 부인 메리 볼과 혼인하였다. 어거스틴과 메리 볼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조지는 장남이었다. 조지의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정도에서 그쳤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영국으로 유학 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조지는 어린 시절에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 항상 지휘관을 맡았다. 그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중재자 역할을 했다.

 

 

 

당시 가부장제는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재산은 이복형인 로렌스의 것이었다. 조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조건이 그에게 오히려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다. 다행히 좋은 멘토도 있었다. 첫 번째 멘토는 이복형 로렌스였다. 로렌스와는 14살 차이나 나지만 조지는 형을 무척 따랐고, 형도 동생을 잘 이끌어주었다. 형이 버지니아 주의 명문가 페어팩스 집안에 장가를 가자 조지도 자주 그 집안에 드나들게 되었다. 사돈이 되는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은 조지의 새로운 멘토가 되었다. 형과 페어팩스 대령의 조언에 따라 조지는 독학하여 측량사가 되었고 일자리도 얻었다.

 

1748년 페어팩스 대령의 아들 조지 윌리엄은 셀리 게리와 혼인했는데, 당시 16세의 조지 워싱턴은 그만 셀리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워싱턴은 셀리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서로 편지도 교환했다. 그것은 아마도 청소년 시절의 턱없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사랑이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759년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혼인한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부인 마사 커티스의 초상화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 전례 없는 역사를 이끌어간 지도자

1752년(20세) 형과 윌리엄 대령의 주선으로 영국군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세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 해 7월 형 로렌스가 죽었지만, 그때 조지는 모든 슬픔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식민지 출신인 조지는 영국 정규군이 될 수 없었다. 좌절한 조지는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 전쟁 경험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이 될 자질을 닦은 훌륭한 훈련이었다.

 

 

 

버지니아주 군대의 대령 유니폼을 입고 있는 조지 워싱턴. 그를 그린 그림 중
가장 초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젊은 워싱턴의 모습을 담고있다.


젊은 시절 조지 워싱턴의 인생 목표는 간단명료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늘 배우고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군인의 길을 포기한 워싱턴은 정치에 도전했다. 그는 1759년 버지니아 주의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워싱턴은 영국 정부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새로 창설하기로 한 대륙군의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군대의 실체는 없었다. 각 주마다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장해야 했다. 버지니아에서는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워싱턴은 훈련 받지 못한 군인들과 무기와 군수물품의 태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야 했다.

 

아메리카의 혁명세력이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그들의 상당수는 식민지의 자치를 원했다. 그러나 영국 왕 조지 3세가 대륙회의의 요구를 전면 무시함에 따라, 더욱 결정적으로는 1776년 1월 토마스 페인의 소책자 <상식>이 발간됨으로써 독립에 대한 갈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1776년 7월 4일 워싱턴은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를 확인하고 난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 후 말했다. “여러분,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은 하느님이 보호하고 계십니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은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종결시켰다.

 

 

 

1783년 파리조약이 체결된 후 워싱턴은 군의 통수권을 연합회의에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합회의는 각 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앙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합회의는 국가의 운영원칙을 세우기 위해 제헌의회를 구성하였다. 각 주의 대표들은 워싱턴을 의장으로 뽑았고, 워싱턴을 의장으로 한 제헌의회는 미 합중국의 헌법을 만들었다. 그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 결과 1789년 2월 4일 워싱턴이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더불어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새로운 민주정부 체제 아래서 전례 없는 역사를 창조하는 막중한 임무를 실로 엄격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수행해나갔다. 먼저 합리적인 행정부를 구성하여 공명정대한 인사권을 발휘했다. 그에게 혈연, 지연, 학연, 종교, 친구관계 등은 일절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오직 능력에 따라 재무장관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국무장관에는 토마스 제퍼슨, 전쟁장관에는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는 에드문트 랜돌프를 임명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노선을 폄으로써 적을 만들지 않았고, 국립은행을 창설하고 위스키 제조업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단호한 재정 정책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세력과 인권 문제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여성 참정권은 이미 제헌의회에서 무산되었다. 대통령 자신은 인종차별 등에 비판적이었지만, 차별을 철폐하는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백인 남성 위주의 인재만을 등용했다.

 

 

조지 워싱턴이 군 통수권을 연합의회에 반환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워싱턴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몬로 등과 함께 서있고, 그의 부인과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다.

 

  

 

뒷마무리가 아름다웠던 대통령, "나 죽거든 사흘이 지나기 전 묻어주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퇴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재선은 수락했으나 워싱턴은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전혀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 선에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다.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워싱턴은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고별 연설’이었지만, 연설로 행해진 것은 아니고 일간신문에 발표되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다. 그것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퇴임 후에 고향에 돌아갔지만 1798년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워싱턴은 다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피를 조국에 바치겠다”라며 수락했지만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799년 2월 자필로 긴 유언장을 작성한 워싱턴은 그 해 12월 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줄 것이며,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시켜달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일구어낸 독립운동가이자 첫 단추를 잘 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아름다운 뒷마무리가 더욱 돋보인 인물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쓴 브래들리 T. 존슨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인간 워싱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워싱턴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감정이 격했지만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의지력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신, 현명함, 관용, 정의감과 조화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재성은 없었지만 그는 신속한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지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성이 있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김형곤 교수(건양대, 미국사)가 쓴 <조지 워싱턴 - 미국의 기틀을 만든 불멸의 리더십>(살림, 2009)은 조지 워싱턴의 생애가 남긴 교훈에 초점을 맞추었다. 워싱턴이야말로 어린 시절 자신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로 실력을 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전진했다. 정직하고 용기 있었으며,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였다. 늘 일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워싱턴이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고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는 고귀한 품성을 지닌 대통령이었다고 말한다. 워싱턴의 생애가 전해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읽으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조지 워싱턴-미국의 기틀을 만든 불멸의 리더십

 

 

제임스 T. 플렉스너의 <조지 워싱턴>(정형근 옮김, 고려원, 1994)은 절판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전기이다. 조지 워싱턴의 생애를 재미있고도 자세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도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워싱턴이 전투하면서 이동한 경로까지가 지도로 그려져 있다. 이 책에는 영국 정규군의 꿈을 키우던 식민지 소년이 독립군 총사령관과 초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겪었던 갈등과 고난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의 생애를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물론 소설처럼 편안하게 그의 생애에 접근하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지만, 도서관에서는 빌려볼 수 있다.

 

 

 

<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 1776년 1월 10일 '상식'을 출간한 혁명 이론가 토마스 페인

                                                 1775년 3월 23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명연설을 남긴 패트릭 헨리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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