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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55.03.11 페니실린 발견 알렉산더 플레밍 사망

루지에나 2013. 4. 5. 06:02

1955.03.11  페니실린 발견 알렉산더 플레밍 사망

 

 

 

 

 

 

 

1928.09.03  페니실린 발견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9654

 

 

 

 

 

 

 

페니실린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사망(1955.03.11)-부산매스미디어뉴스, 2011.03.11.
http://www.pnpnews.co.kr/paper/news/view.php?papercode=news&newsno=5437


페니실린 발견 알렉산더 플레밍 사망(1955.03.11)-동아일보, 2008.03.11.
http://www.donga.com/fbin/moeum?n=dstory$c_134&a=v&l=27&id=200803110118

 

 

 

 

 

 

 




나무 가시에 찔리거나 못에 긁히는 것만으로도 운이 나쁘면 팔이나 다리를 잘라야 했다. 심하면 목숨을 잃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그랬다. 페니실린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1928년 여름휴가에서 돌아온 알렉산더 플레밍은 영국 런던 세인트메리병원 실험실에서 세척할 배양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곰팡이가 핀 주변으로 포도상구균 덩이가 녹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곰팡이에서 나온 물질이 세균을 파괴한 것이다. 페니실린 발견의 순간이었다.

1941년 2월 12일 43세의 경관이 최초로 페니실린 치료를 받게 된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고름이 뒤덮였고 감염 때문에 왼쪽 눈을 제거해야 했다. 오른쪽 눈도 위험한 상태였고 뼛속 깊숙이 균이 침투해 오른쪽 팔에서도 고름이 나왔다. 그는 단지 2개월 전 장미나무에 얼굴을 긁혔을 뿐이다.

페니실린 투입 후 환자 얼굴의 농양은 사라졌고 정상 체온을 되찾아 식사도 잘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만들던 페니실린 생산량이 부족해 결국 치료는 실패한다.

페니실린을 정제하고 대량 생산해 환자 치료에 적용한 인물은 플레밍의 논문을 보고 연구에 매진한 생화학자 언스트 보리스 체인과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였다. 대량 생산된 페니실린은 인류에게 ‘마법’이 됐고, 세 사람은 1945년 10월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위대한 발견은 우연을 디딤돌로 삼았다.

플레밍의 실험실로 날아든 그날의 곰팡이는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플레밍 자신도 몰랐던 희귀 곰팡이. 아래층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에 균류 전문가의 실험실이 없었다면 얻기 힘든 행운이었다. 또 포도상구균과 곰팡이의 성장 온도는 큰 차이가 나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런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가 상승하면서 곰팡이가 제대로 피었다.

그러나 그 우연은 ‘준비된 우연’이었다. 플레밍은 콧물 속 효소인 라이소자임이 특정 박테리아를 녹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봐 두었기에 페니실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류를 감염의 공포와 죽음에서 탈출시킬 약제를 찾기 위해 꾸준히 실험하고 준비했다. 1955년 3월 11일 그는 영면했다.

 

/동아일보

 

 

 

 

 

플레밍 ( Alexander Fleming : 1881 - 1955 )  

영국의 미생물학자. 1906년 런던 대학의 세인트메리 병원의 학교를 졸업하고 동교의 A.라이트연구실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1908년 그곳 미생물학 강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 군의단에 배속되어 참전하고 1918년 모교로 돌아와 1928년 교수로 승진하였다. 1943년 왕립협회 회원으로 추천되고, 1944년에는 Sir의 칭호를 받았다.


일찍부터 항(抗)세균성 물질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전시(戰時)에도 그 연구를 계속하여 1922년 세균을 죽이는 리소자임을 발견하여 분리했다. 192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던 중 우연히 포도상구균 배양기에 발생한 푸른곰팡이 주위가 무균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푸른곰팡이의 배양물을 800배로 묽게 하여도 포도상구균의 증식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 명명하였다. 이 연구로 인하여 1945년 공동 연구자인 E. B. 체인, H. W. 플로리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

 

   Alexander Fleming(1881~1955)은 푸른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의학•생리학 부문의 노벨상을 받은 학자이고,  John Ambrose Fleming(1849~1945)은 고등학교 교과서의 전기자기 부분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플레밍의 법칙을 소개한 학자로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태어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플레밍은 우리 나라에서 얘기하는 성으로 같고, 이름은 다른 사람들인 셈이다.

 
<Alexander Fleming>

  "우연은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 파스퇴르 -
    
실험실에서 세균들을 배양하고 연구하던 플레밍은 아주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포도당 구균들을 배양해 놓은 샤알레(유리 접시)를 현미경으로 유심히 관찰하다가 우연히 푸른 곰팡이가 생기면 그 주위의 포도상 구균이 녹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자칫 잘못된 배양으로 판단하고 샤알레를 버렸을 지도 몰랐다고 한다.

     ↑ <페니실린 현미경 사진>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집중한 결과, 푸른 곰팡이에서 포도상 구균이나 폐렴균 등을 죽여 버리는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페니실린은 그 후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어 많은 사람들이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병치료와 예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한번 걸리면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던 폐렴, 디프테리아, 파상풍 등이 치료되게 되었다. 플레밍이 옛 스승으로부터 받은 감동적인 편지 한 편을 소개한다.

   "사랑하는 알렉 아가야!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나의 가습 속에서의 너는 아직도 여전히 아홉 살 때의 그 귀여운 모습 그대로란다. 그 옛날의 귀엽고 착한 아가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 동안 나는 네가 걸어온 길을 말없이 지켜보아 왔다. 네사 성공할 때마다 기쁘고 자랑스러워 무척 행복했단다. 조금 전에 페니실린 발견의 감격적인 이야기를 쓴 책을 읽었는데, 읽는 도중에 나는 그 책 어딘가에 한몫 끼어 이쓴 것 같아 무척 기뻤지. 한 가지 네게 알려줄 소식이 있다. 내 친척 아가씨 헤젤 스탈링도 페니실린 때문에 살아났단다. 아가야! 더욱 몸 건강하고 또 연구 많이 하길 빈다. - 매리온 스탈링."

 

 

 

 

 

플레밍 [ Sir Alexander Fleming ]

1881. 8. 6 스코틀랜드 에어 록필드~1955. 3. 11 런던.

스코틀랜드의 세균학자.

 

1928년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감염성 질병에 대한 항생제 치료법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39년부터 플레밍의 기본적인 발견들을 더욱 진전시켜 페니실린을 분리·정제하고 시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얻기 위해 시도했던 E. B. 체인, H. W. 플로리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06년 런던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인간 조직에 무해한 항세균성 물질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왕립군사의무단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했다. 1918년 연구와 강의를 위해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왔으며, 왕립외과협회의 헌터좌(座) 교수가 되었고(1919), 애리스앤드게일 강사가 되었다(1928). 1921년 눈물·타액 등의 분비액과 일부 동물조직에서 발견되며 항생작용을 보이는 효소인 리소자임을 동정(同定)하고 분리했다. 포도상구균을 대상으로 연구하던 1928년, 이 세균의 배지에 오염으로 증식한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의 포자 주위에 무균의 환(環)이 형성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800배 정도로 희석해도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그대로 지닌 물질을 곰팡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하고, 1년 후 그 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 저널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에 발표했다. 1943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페니실린 [ penicillin ]

페니실리움속(―屬 Penicillium) 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항생제.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히 푸른곰팡이인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으로 오염되어 있는 배지에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화농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곰팡이를 분리하여 액상 배지에 배양해 이 곰팡이에서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는 일반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1940년에 다른 연구자들이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페니실리움속 곰팡이에 의해 합성되는 몇 종류의 페니실린은 생합성(生合成) 페니실린(곰팡이에 의한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과 반합성(半合成) 페니실린(모든 페니실린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인 6-아미노페니실린산의 화학구조를 변화시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페니실린의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항생제의 성질도 달라지므로 여러 형태의 페니실린이 치료 목적에 따라 다르게 생산되고 있다. 벤질페니실린(페니실린G)은 현재까지 임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천연 페니실린이다. 페니실린G는 산에 불안정해 위를 통과하면서 대부분 분해되므로 충분한 약효를 얻기 위해서는 근육내 주사로 투여해야 한다. 일부 반합성 페니실린은 산에 안정하기 때문에 경구 투여할 수 있다. 모든 페니실린류는 세균의 세포벽 합성을 담당하고 있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하고 또한 유기체의 방어벽을 부수는 다른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포벽이 없는 미생물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다. 전에는 페니실린에 감수성이 있던 세균의 일부 균주들은 페니실린에 대해 내성이 생겼다.

 

즉 이들 세균은 페니실린의 내부 구조를 파괴하는 효소인 페니실리나아제를 생산하여 약물의 항균작용을 파괴하거나 자체 세포벽의 페니실린 수용체를 감소시켜 약물이 세균의 세포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크게 감소시킨다. 페니실린에 감수성이 있는 세균 중에는 인두감염·폐렴·척수막염·가스괴저·디프테리아·매독·임질 등을 유발하는 것들이 있다. 페니실린의 주요부작용으로는 피부발적·담마진·종창·아나필락시 등과 같은 알레르기 반응(과민 반응)과 알레르기 쇼크가 있다. 경증의 증상은 코르티코스테로이드로 처리하면 되지만 대부분의 부작용은 교대 투약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다. 아나필락시성 쇼크는 이전에 투약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수초 또는 수분 내에 나타나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반응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에피네프린을 즉시 투여해야 한다.

 

 

/네이트 백과사전

 

 

 

페니실린

수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불과 20~30살에 불과했다. 태어난 아이 10명 중 3명은 1살도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절반 정도가 10살 이전에 사망했다. 그 이유는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 콜레라, 이질, 설사, 폐렴, 패혈증 같은 질병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인류는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기껏 귀신의 저주이거나 나쁜 공기에 의한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인간이 걸리는 질병의 대부분이 미생물 때문이란 사실을 밝힌 사람은 파스퇴르코흐였다.

 

 

대부분 질병의 원인은 미생물

미생물에 의한 질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예방과 치료 두 가지로 형태로 발전했다. 이중 예방법은 좀 더 빨리 등장했다. 1796년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를 막기 위해 우두를 만들어 최초로 예방접종을 했다. 하지만 당시 제너가 예방접종의 원리를 알아낸 것은 아니었고, 1885년이 돼서야 파스퇴르가 원리를 알아냈다. 그는 광견병 예방접종을 만들면서 균의 독성을 약화시켜 주입하면 우리 몸에 면역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원리에 입각해서 홍역, 풍진, 볼거리, 소아마비 등의 예방접종이 계속 개발됐다.

 

그러나 미생물을 직접 억제하거나 죽이는 항생제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먼저 특정 질병은 특정 병원균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이 확립됐다. 그중 독일의 에를리히는 매독균을 억제하는 특효약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무려 606번의 실험 끝에 비소화합물인 살바르산 606호를 만들어냈다. 당시 매독 치료제로 썼던 수은은 부작용이 많고 효과는 적었는데, 살바르산은 화학요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여러 항생물질은 인간에도 해롭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페니실린은 인체에 비교적 해롭지 않은 항생물질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기적의 약물’인 항생제는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이 찾아냈다.


예방접종의 원리를 알아낸 루이 파스퇴르. <출처: Wikipedia>

 

 

행운이었지만 행운만은 아니었다


플레밍은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에 런던으로 가서 안과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형의 집에서 폴리테크닉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세인트 메리 의과대에 들어갔다.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배지에서 곰팡이가 떨어진 부분 주위로 포도상구균이 녹아 있다.(왼쪽)
플레밍은 푸른곰팡이(오른쪽)에서 나온 물질이 포도상구균을 죽였다고 추정했다.

 

 

플레밍은 미생물학자가 됐다. 그는 페트리접시라는 특수한 배양접시에 미생물을 키우면서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연구를 통해 눈물에서 추출한 라이소자임이라는 효소가 몇몇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종종 위대한 발견에는 행운이 따르는 법이다. 플레밍이 일하던 실험실의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접시를 배양기 밖에 둔 채로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페트리접시를 확인하던 중 푸른곰팡이가 페트리 접시 위에 자라있고 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깨끗하게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재수 없는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평소 항균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해석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른곰팡이의 대부분은 페니실린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만이 페니실린을 만든다. 그리고 이 특별한 곰팡이는 아래층의 라투슈의 연구실에서 올라와 플레밍의 페트리 접시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 것이었다.

 

페니실린을 상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험에 몰두 중인 플레밍. <출처 : Wikipedia>


플레밍은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리고 배양된 곰팡이를 새로운 액체 배지에 옮기고, 다시 1주일이 지난 뒤 배양액을 1,000분의 1까지 희석했는데도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됐다. 이로써 곰팡이가 생산해 내는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 곰팡이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속에 속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곰팡이가 만든 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불렀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외에도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냈다. 특히 연쇄상구균, 뇌수막염균, 임질균, 디프테리아균 등 인간과 가축에 무서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에 효과가 컸다.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이 다른 약물들에 대체로 취약한 인간의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과 페니실린을 생쥐에 주사하여도 거의 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플레밍은 이듬해인 1929년 연구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발표했다. 그러나 플레밍을 실망시키는 실험 결과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플레밍이 토끼의 혈액 속에서 페니실린의 항균력을 측정한 결과 그 효과가 30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또 동물 장기를 세균이 포함된 용기에 넣었다가 다시 페니실린 용액에 담그자 동물 장기 표면의 세균은 멸균됐으나 장기 내부의 세균은 남아 있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조직 내부로 침투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그만 페니실린 연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또한 페니실린 상용화에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페니실린을 약품으로 정제하는 것. 곰팡이를 직접 인간에게 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정제해야 하는데 플레밍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니실린 상용화까지


플레밍의 위대한 발견은 오스트리아 출신 플로리와 유대계 독일인 체인 덕분에 사장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35년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교수로 발령받은 플로리는 곧 체인을 화학병리학 실험 강사로 채용했다. 플로리는 전부터 눈물과 침 등 점액에 들어 있는 라이조자임에 관한 플레밍의 논문에 관심이 있었다. 플로리는 1937년 체인과 공동으로 라이소자임을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라이소자임을 연구하는 동안 항균물질에 대한 논문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939년 플로리와 체인은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다. 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을 정제하여 결정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정제된 페니실린을 가지고 동물 실험을 시도했다.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10마리의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 5마리에는 페니실린을, 5마리에는 가짜약을 투여했더니 페니실린을 맞은 쥐들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동물 실험을 거듭해 1940년 의학 저널 ‘란셋’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전염병 치료 효과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 대상의 임상시험뿐. 이듬해인 1941년 인간에게 최초로 페니실린이 투여됐다. 패혈증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앨버트 알렉산더에게 페니실린 200mg이 투여된 것이다. 페니실린은 3시간 단위로 투여됐는데 그 효과는 놀라웠다. 24시간도 안 되어 알렉산더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체온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곪아가던 상처가 낫기 시작했으며 입맛도 돌아왔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엿새 만에 임상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알렉산더는 사망했지만, 이 임상시험은 인간이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무기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실하게 알린 사건이었다.


페니실린이 작용하는 부위는 미생물 세포의 세포벽이다. 세포벽이 유지되려면 펜타글리신 연결이 필요한데 페니실린은 펜타글리신 합성을 막는다. 세포벽에 구멍이 뚫린 세포는 삼투압으로 ‘터져’ 죽게 된다.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상용화에 성공해 194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는 민간에도 사용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페니실린의 개발자인 플레밍과 함께 플로리와 체인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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