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덩샤오핑

루지에나 2014. 2. 1. 00:18

3, 덩샤오핑

국민을 사랑한 개혁 형 리더

중국에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다. 마오쩌둥은 인민을 신분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치적 해방을 했고 덩샤오핑은 인민을 먹고 살게 한 경제적 해방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구질서를 깨뜨린 판에 중국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새 판을 짜 넣은 인물은 덩샤오핑이다. 덩샤오핑은 제 1세대 정치인이라면서 2세대, 3세대를 아우르는 정치권의 힘을 보여줬다. 마오쩌둥이 별세한 후 1978년 복식하면서 덩샤오핑의 혁명은 제대로 빛을 내기 시작한다.

개혁개방의 경제 대통령

덩샤오핑의 비전과 목표는 흑묘 백묘 론으로 압축된다. 검은 공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경제 개혁개방이론이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여부를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로 비유를 들어 정치사상을 국민들에게 쉽게 심어줬다. 또 아랫목이 따뜻하면 자연히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말로 후 분배 선성장의 선 부론을 자연스럽게 주입시켰다. 국민을 설득하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 반항이 많았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배해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개방에 대한 시동을 부드럽게 걸 수 있었다. 그의 이론은 Black Cat, White Cat Theory 로 번역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쓰촨 성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3억 중국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분명 국제사회에서 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며 13억 중국 국민을 먹고 살게 해 평화를 유지하게 한 덩샤오핑에 대해 노벨 평화상 혹은 노벨 경제학상 감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좋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토대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견고하게 다졌다. 농업, 공업, 과학, 기술의 근대화가 개혁의 목표였다. 그는 경제 개혁을 하는 데 필요하면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이라 할지라도 반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또 대통령을 주축으로 경제개혁안이 나오는 여느 국가들과는 달리 덩샤오핑 본인에게서부터 나온 경제개혁안은 없었다. 상향식 개혁이 바로 성공의 열쇠였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이 철저하게 검증한 동아시아의 개혁경험을 가져와 계획적으로 추진했다. 대중 선동적인 경제건설보다는 시장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인 서구 국가 경제계획과 메커니즘을 본 딴 것이다. 변화와 혁신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절대적으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며 반드시 발전으로 이끌어내는 성과를 창출하는 리더십이 엿보인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오른다.

그의 경제 개혁개방은 인류복지향상의 가장 큰 발전을 가져온 개방이라는 평가다. 사회주의 틀 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고 시장을 개방하는 등 국정 및 성과창출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와 혁신에도 능했지만 더불어 자신과 중국이 나가야 할 방향, 10년 후, 20년 후를 보는 식견이 남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미국도 두려워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됐다. 1978년에서 1989년까지 공식적으로 중국을 이끌었던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덩샤오핑과 회담을 해야만 회담이 이뤄졌다고 볼 정도였다. 단순힌 권력으로 승부했던 마오쩌둥과 비교하면 천양자판이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문을 닫았지만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개방은 그가 죽은 지 1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세계 경영자들은 중국의 정, 재계 실력자들과의 회담을 바란다. 중국의 대대적인 명절 춘절 때문에 다보스포럼에 적극적이지 않은 중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계 경제 올림픽은 다보스에서 하계 경제올림픽은 중국에서 개최하는 방법까지 고안해냈다. 이러한 개혁개방을 설파하고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주인공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그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좋을 듯싶다. 아무런 직책이 없어도 그의 정치 감각은 노화순청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날로의 불이 파랗게 타오르는 경지, 예술이나 기예가 최고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그를 표현한다. 경제개발과 함께 통일의 발판을 마련해높은 덩샤오핑은 홍콩 반화의 업적도 높이 평가받는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의 회담에서 대처를 나약하기 그지없게 만든 외교담판이었다. 홍콩 반환을 두고 대처는 주권을 관리권으로 바꾸자는 하향 제안도 무참히 거절당했다. 대처가 회담 후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지는 실족 순간이 포착되면서 강철보다 단단한 대처에게 부드러운 덩샤오핑의 판정승을 거뒀다며 대서특필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인재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3세대로 통하는 장쩌민과 함께 주룽지, 리펑이 체제를 구축한 것도 덩샤오핑이었으며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청찡홍의 4세대 진용까지 판을 짜놓고 간 인물이다.

냉철함과 온유함의 양면성

그는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판단해 자신이 나설 때를 아는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마오쩌둥에게 3번 내침을 당하고서도 3번 일어났으랴. 그는 힘을 비축할 때까지 미국에 맞서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점은 죽기 전 공산당 고급 간부들에게만 열람되는 문서를 통해 밝힌 것이다. 이러한 당부는 도광양회 즉 빛을 감춰 밖으로 비치지 않도록 한 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일부러 몸을 낮추고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으라는 것이다.

그의 경제는 개혁개방, 외교는 도광양회를 양 축으로 삼았다. 덩샤오핑의 20자 방침으로 통하는 그의 비전이자 중국인들을 향한 강한 외침이다. 냉정히 관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며, 자신의 확고히 하고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려야 하며 능력을 발휘해 성과를 이룩해야 한다. 독서와 사색을 놓지 않았으며 치매 예방으로 카드게임을, 장수를 위해 바다에서 수영을 즐겼다. 덩샤오핑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으나 문화혁명 당시 하반신 불구가 된 큰아들이 늘 가슴에 한이었다. 그러한 아들을 매일 직접 씻기고 척추 마사지를 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손자의 기저귀를 손수 말려가며 손자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산 보통의 할아버지와 다름없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천상의 소리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한 그는 평소 말수는 적었지만 유머감각도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차갑다는 인상을 줬지만 그의 부인은 따뜻한 보온병과도 같은 사람이라며 덩샤오핑의 인간적인 모습을 말한다. 중국을 일으킨 냉철한 정치가이자 온유함을 겸비한 덩샤오핑의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따라갈 자가 없을 만큼 대단했다. 헐벗고 굶주린 국민들에게 집이 돼 주고 옷이 돼주고 음식이 돼주고자 했다.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때 한 노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덩샤오핑을 회상했다.‘오늘날 충정을 갖고 국민에게 봉사한 덩샤오핑 같은 인물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평생 모은 재산은 100만 위안(1억 2천만원정도)으로 이것조차 교육 사업에 기증한 그는 자식들에게도 자기 능력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죽은 후 기념관 대신 나무를 많이 심으라는 것, 죽은 후 각막과 장기를 기중한 것, 유체는 해부용으로 내놓은 것, 유골은 바다에 뿌려진 것 등 대국을 호령한 영웅의 마지막은 소박하지만 죽어서도 중국의 환경과 과학발전에 전신을 바쳤다. 하지만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1989년 수 천 명의 사상자를 낸 텐안먼(천안문) 사태 무력진압 배후라는 치명적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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