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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776.03.05 조선의 제21대 임금 영조 사망

루지에나 2013. 4. 3. 13:39

 

1776.03.05  조선의 제21대 임금 영조 사망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11. 사사로운 원한 버리고 상생의 정치 실현한 '정조'

 

중용에 따라 탕평책 펼쳐 대통합의 정치 이끌어

⊙ 사도세자는 정쟁(政爭)의 희생양 이었다

28세로 숨을 거둔 정조(正祖) 임금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임인사화(壬寅士禍)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에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영조(英祖) 25년,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소론,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정치적 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영조 38년(1762),노론 세력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나경언의 고변이 발단이 되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임오화변의 비극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엄청난 비극을 몸소 겪은 정조는 자신을 표현하여 '하늘을 꿰뚫고 땅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견뎌내야 했다.

결국 52년간 왕위에 있던 영조가 1776년 3월5일 죽자 소렴과 대렴이 끝난 5일 후인 3월10일 조선 22대 왕 정조가 25세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가 내린 첫 교지는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원통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고 탕평책 통해 실력있는 인재 등용

그러나 정조는 왕위에 등극하고도 자신의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실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오직 그 사람을 보아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릴 것'이라는 탕평책에 근거한 자신의 인사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정조에게 있어 '탕평(蕩平)'이란 '편당'을 제거하는 것이며,남과 나를 구분짓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갈등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모든 신하를 한 가족과 같은 동포로 보아서 그 잘잘못을 가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국왕이 적극 담당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중용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관의 표현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분당(分黨:당파를 나눔)'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공론(公論)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영조가 탕평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분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져 갔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은 자연스럽게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특히 노론 중에 온건파 인물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되어 영조 대(代)의 탕평책을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호칭하였다.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인좌의 난' 등을 비롯한 잦은 변란을 일으키면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결국 노론은 탕평파로 이름만 바꾸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탕평을 내세워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권력 유지에만 집착하게 되어 처음의 본질과 다른 방향으로 탕평정신이 변질되어 갔다.

영조 대(代)에 탕평당을 비판했던 강경파를 대체로 각 붕당의 '준론(峻論)'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서도 탕평정국에 참여하면서 '탕평당'을 견제했던 정파 전체를 '청류당'으로 호칭할 수 있는데,남인 청론,소론 준론,노론 청명당,이 세 정파를 말한다.

이들은 대체로 '의리'와 '명절(名節:명분과 절의)'을 숭상하고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탕평을 주장한 강경 탕평파다.

따라서 정조는 이러한 준론(峻論)을 중심으로 하는 '준론 탕평'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정권 초기부터 노론 중에서도 홍국영 등의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이 실시되었다.

결국 정조의 '준론' 탕평은 영조 대의 '완론' 탕평에 대한 반성으로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 하는 탕평이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정치를 '의리의 탕평'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정조가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각 붕당의 명분을 존중해줄 때 비로소 공존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붕당 간의 의리와 인재를 중립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방식을 통하여 정치에서 붕당의 의미를 중시하는 '의리의 탕평책'을 전개해 나갔다.

이것은 원칙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을 막론하고 관리로 등용하겠다는 정조 자신의 공정한 인사 원칙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실천으로 받아들여진다.

⊙ 탕평(蕩平)정치의 시작은 중용이다

'중용(中庸)'은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으로서,그 핵심은 '중(中)'의 의미에 있다.

'중'이란 간단히 말해 '양쪽 끝의 중간'인데,중용사상에서는 모든 사물에 양쪽 끝이 있으며,그 양쪽 끝은 '대립'과 '통일'이고,이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상태,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향해 이동하는 것은 '중'이 아니며,어느 한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역시 '중'이 아니다.

따라서 '중'이란 움직이되 바로 적당한 위치를 벗어나서는 안 되며,정지해 있어도 적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중용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은 한쪽의 힘으로 다른 한쪽의 힘을 상쇄시켜,저울이 평형을 이루듯 양쪽 끝의 힘을 같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중용에 있어서 '중(中)'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고,'용(庸)'은 평상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공자도 '대립되는 두 끝을 잘 헤아려 그 적절함으로 백성을 위한다'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 등의 문구를 통하여 중용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하여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액자를 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며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의 인사정책이 붕당이나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노론·소론뿐만 아니라 서얼(庶孼) 신분이라도 실력있는 사람 중심으로 편향되지 않게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정조가 실시한 탕평정치는 '어느 한쪽으로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중용의 원칙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자 하였던 것이다.

⊙ 이열치열의 통치방식 통해 대통합의 정치 시작

정조의 탕평책은 각 당파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是非)논쟁을 종식시켜 붕당 간의 살육전을 그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하여 정조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통치방식을 채택한다.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이란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그를 반대당파의 반역자와 대비시켜 다스리고,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한 당이 집권했을 때 반대당을 모조리 숙청하지 않고 붕당 간에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더욱이 정조는 '이열치열'의 탕평책을 통해 과거 당쟁이나 역모에 연루되어 있는 인재들까지 다시 등용하는 '소통(疏通)의 정치'를 펼쳤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치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고 침체되어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정조의 상생(相生)의 정치 실현을 위한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조의 대화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한쪽의 힘으로 다른 한쪽의 힘을 상쇄시켜,저울이 평형을 이루듯 양쪽 끝의 힘을 같게 만든다'는 중용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여 어긋나지 않는 군주의 마음이다.

결국 정조는 당시의 인재를 통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적 조건이라면,국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중용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정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입장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의 탕평책을 실천하여 공존과 상생의 정치를 이끌어 나간 정조의 정치적 리더십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한 성군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 한국경제

 

 

 

영조[ 英祖 ]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1724~76 재위).

 

 

조선 후기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해 당쟁의 조정에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양역(良役)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사회변화에 대응해 실학(實學)의 진작 및 문화창달에 노력했다.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즉위와 탕평책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1720년(경종 즉위)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아들인 경종이 33세로 즉위했으나 자식이 없었고, 왕자가 태어날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노론측이 경종의 동생인 그를 세제(世弟)로 책봉하자는 논의를 일으킨 결과,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후원하에 1721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노론은 더 나아가 경종이 병이 많음을 들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킬 것을 주장했다. 경종의 비망기(備忘記)를 얻어 대리청정이 일단 허락되었으나 찬성 최석항(崔錫恒),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등의 강력한 반대와 각지 수령, 성균관 학생, 각 도 유생들의 반대상소로 대리청정이 취소되었으며, 이 일을 추진했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경종에 대한 반역으로 치죄되어 귀양가고( 신축옥사), 이듬해 이들을 비롯한 60여 명이 처형되었다( 임인옥사). 이 과정에서 그는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노론편인 인원왕후의 강력한 비호로 위기를 넘기고, 1724년 경종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영조는 즉위 직후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고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대신을 파직시켰으며,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을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수립하고, 노론 4대신을 신원해 복관시켰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노론의 집권은 당연하지만 신임사화와 같은 살륙의 보복은 피하고, 노론의 전제를 막아야만 불안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노론이 유봉휘(柳鳳輝) 등 소론 4대신을 비롯해 신임사화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죽일 것을 주장하자 정미환국을 단행하여 노론대신들을 파직시키고 일시 소론정국을 만드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정국의 변동을 단행하고 탕평파를 키우는 등 노력을 했으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더욱이 1728년에는 실각한 준론파(峻論派) 소론과 남인을 중심으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영조는 신임사화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완론파(緩論派) 소론 계열을 노론과 아울러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탕평책을 펴게 되었다. 탕평책 시행 초기에는 인사정책으로 상호 견제되는 권한을 갖는 자리에 다른 당색의 사람을 배치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했다. 인물의 기용도 각 파당 내의 강경파들을 배제하고 탕평론자들로 구성했다. 그뒤 어느 정도 국면이 수습되자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여 노론 외의 당색도 기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등장을 꺼려하여 노·소론의 파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아가 노론은 경종대의 소론의 집권명분을 일체 반역으로 규정하고 집권기반을 굳혀나갔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1755년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간행하여, 소론이 경종과 관련되어 있었던 일체의 정치적인 명분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그 대신 노론이 영조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충의로 정립해 소론의 의리론상의 근거를 완전히 박탈했다.

 

영조가 말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되는 비극적 사건도 근본적으로는 정쟁에 그 원인이 있었다.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맡았던 장헌세자(莊獻世子)는 노론전제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노론집권의 의리를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소론이나 그밖의 반대세력의 정견을 옳다고 보고 있었다. 이에 노론은 장헌세자가 장차 왕위에 오르면 노론을 몰락시킬 수 있다고 보아 온갖 수단으로 그를 제거하려 했다. 또한 노론의 의리와 명분론에 근거하여 왕위에 오른 영조로서도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론의 입장을 따라야만 했다. 그결과 1762년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을 계기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 사도세자사건).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위호(位號)를 복구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헌세자의 아들인 세손(뒤의 정조)을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했다.

 

정책

영조집권기는 중세사회가 해체되어가던 시기로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각종 싹이 나타나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모순된 제도를 고치고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신분제도의 측면에서는 1731년 남자노비가 양인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인정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확정지었다. 이것은 1744년에 완성된 〈속대전〉에 등재됨으로써 이후 노비제 해체의 중요한 한 단서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1729년 오가작통법 및 이정법(里定法)을 개정하여 무너져가고 있던 신분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772년에는 조선 전기 이래의 서얼차대로 사회 진출의 길이 막혀 있던 서자들이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1774년 첩자손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또한 탕평책을 보다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1741년 당파의 근거지인 서원·사우를 함부로 짓거나, 제향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1714년(숙종 40) 이후에 창건한 향현사(鄕賢祠)와 영당(影堂) 170여 개를 훼철했다. 1772년에는 탕평과라는 과거시험을 실시하고,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어 당색을 타파하려는 의식을 심으려 노력했다.

 

경제면의 시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균역법의 실시이다. 영조는 당시의 가장 큰 사회문제로서,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의 각종 모순을 수반하면서 농민경제를 위협하던 양역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1748년 전국의 양정수(良丁數)에 대한 기초조사를 마친 뒤, 1751년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왕족에게 절수(折受)되었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군포의 감필(減疋)로 부족해진 군문의 재정에 충당하는 등 국왕 자신이 일정한 양보를 했을 뿐 아니라, 인두세적 성격이던 군포의 일부를 결역미(結役米)로 1결당 2말씩 토지에서 거두는 토지세로 전환시킴으로써 신분간의 조세불균등을 어느 정도 시정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趙曮)이 고구마를 가져와 보급함으로써 이후 흉년에 구황식품으로 큰 역할을 했다. 행형제도 개선으로는 1725년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추형(追刑)을 금지했으며, 전옥(典獄) 이외에서의 인신구류를 금지했다. 1729년 사형수에 대해 삼복(三覆)을 실시하도록 하고, 1733년 국옥(鞠獄)할 때 낙형(烙刑)을 금지했으며, 1757년 난장형(亂杖刑)을 금하고 지방에서는 태형만 가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1761년 죄인의 부모·형제·처를 잡아가두는 법을 폐지하고,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私刑)을 금했다. 1771년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774년 사문(私門)의 자의적 형벌을 엄금시켰다.

 

국방면에서는 1725년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대신 그 원료로 무기를 만들게 했고, 1727년 북관(北關) 군사에게 조총을 복습시키고, 1730년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총을 만들게 했다. 1740년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건조한 해골선(海鶻船)을 통영 및 각 수영에서 만들도록 하여 해군력을 강화하도록 했다. 1733년 평양중성을 쌓게 하고 1734년 압록강변의 진보에 목책이나 토성을 쌓도록 했다. 이외에도 전주·대구에 성을 쌓고 1744년에는 강화외성을 개축했다. 영조는 스스로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도서의 편찬과 간행·보급에 힘써 문운의 융성을 보게 되었다. 〈어제경세문답 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 爲將必覽〉을 직접 지었으며,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여사서 女四書〉·〈소학훈의 小學訓義〉·〈속오례의 續五禮儀〉·〈속대전〉·〈무원록 無寃錄〉·〈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누주통의 漏籌通義〉·〈해동악장 海東樂章〉·〈여지도서 輿地圖書〉·〈동국문헌비고〉 등을 비롯한 많은 서적들이 편찬·간행되어 문화의 한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영조대에는 이익(李瀷)을 필두로 당시 사회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하여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실학이 발전했다. 영조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 중 가장 긴 52년간을 재위했으며 83세에 죽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처음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쳤다.

 

 

 

/네이트 백과사전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 콤플렉스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위하다

 

18세기 초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는 지난 세기 동안 누적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진검승부가 되었고 각 붕당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숙종년간 남인서인의 대결구도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한 이후,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숙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과 관련하여 또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왕위마저도 쥐락펴락하고자 하는 신하들의 등쌀에 연잉군(훗날 영조)과 그의 배다른 형 왕세자(훗날 경종)는 서로 다른 당을 등에 업고 왕위를 둘러싼 경쟁을 하여야만 했다. 왕세자는 그의 어머니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 했던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잉군은 남인에 대해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론이 밀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지하는 신하들의 당색에 의해 정치적 색깔을 정해야만 했던 숙종의 두 아들은 불행한 이복형제였다. 왕세자는 아버지 숙종의 변덕스런 사랑으로 궁녀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끝내는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부담감이 있었고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왕세자의 어머니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은 보복이 두려워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왕세자가 14세 때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으로 심신이 허약해진 것을 노려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이끌어냈다. 아무리 몸이 허약하다고 하나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후사가 태어날 것을 바라지 않고 신하들이 선동하여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게 한 것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고, 한편으론 목숨을 건 모험이기도 하였다. 왕세제(다음 왕 자리를 이을 왕의 동생) 자리를 확보해 준 노론과 한배를 탄 연잉군에게도 이것은 운명을 건 승부수였다. 이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하여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혹시라도 후사를 본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의 기로에 선 것이다.


연잉군 시절의 영조. 20세때의 모습이다.
<출처 : wikipedia.org>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다. 경종은 왕좌에 있었던 4년 동안, 소론과 손을 잡고 왕권에 도전하는 노론과 왕세제를 견제하였다. 경종 1년, 몇 차례 잡음 끝에 마침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여 다음을 도모할 기회를 얻은 노론은 더 나아가 허약한 경종을 압박, 왕세제의 대리청정으로 정권획득에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왕을 무시하는 이러한 성급하고 무리한 시도는 결국 경종을 분노하게 하였고 경종과 소론의 반격으로 노론은 4 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이 유배를 가는 신축옥사(1721)를 겪는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는 소론 측의 공격으로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을 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를 갔다. 이 임인옥사(1722)의 옥안에 왕세제 또한 경종시해 모의에 참가한 것으로 나와 그의 목숨도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왕세제는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세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그의 이복 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요절하고 만다. 경종의 죽음으로 오랜 세월 왕권을 향해 공을 들여온 왕세제는 마침내 1724년 조선의 2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이인좌의 난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영조의 즉위로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소론 측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영조의 어머니가 엄격하게 제대로 뽑힌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천한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이유익, 심유현, 박필현 등 일부 소론 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살되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다.

 

 

 

탕탕평평의 탕평책을 펴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년간에 일어난 신축,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영조 어진, 영조 51세때의 모습이다. <출처 : wikipedia.org>


그러나 곧이어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내몰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 ; 치우치거나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편하다.)이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완론자)들만 등용하였다. 관직도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배치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 중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이후 어느 정도 탕평책이 안정되자 점차로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바뀌어갔다. 또 영조는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 시키고 붕당 갈등의 중심이 된 이조전랑이 가진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을 철폐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노론의 치우친 영조의 절름발이 탕평책은 영조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결합하여 결국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그것이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건이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

 

 

아무리 영조가 탕평책을 쓴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노론위주로 돌아가는 정치 상황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 층의 불만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소론에게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언제나 은밀한 가십거리였고 또 이것은 언제든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20년도 더 지난 1755년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에 붙었다. 이것이 나주 벽서 사건이다. 벽서를 붙인 자는 영조 즉위 초기 소론을 축출할 때 나주로 유배 간 윤지라는 자였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의 일이 다시금 불거져 나왔다. 왕이 된 지 2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는 자신에 대한 괴소문에 가뜩이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는 격노했다. 그리고 영조의 이러한 격노를 이용해 노론은 눈엣가지 같던 소론을 이 기회에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세자(사도세자)였다. 당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분노와 소론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론의 의도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세자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론은 당황했다. 소론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세자의 태도에 앞날이 불안해진 노론은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를 불이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었다. 영조를 싸고도는 노론에 대항해 남인과 소론, 소북 등 중앙정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세력들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에게 줄을 섬으로써 아버지 영조와 아들 세자 간에는 묘한 정치적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세자의 상식을 벗어난 과격한 행동들이 노론에게 꼬투리를 제공하였다. 정성왕후가 죽은 뒤 60대의 영조가 노론 강경노선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새로 맞아들인 왕비 정순왕후는 세자의 입지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는 세자의 실행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하여 무고함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개인적 콤플렉스 탓인지 원래부터 편애가 심하였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세자 또한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미행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일들을 벌여 갈등의 골을 심화시켰다.

 

그 와중에 노론 측에서는 세자를 폐위하고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10조 목의 글을 영조에게 올렸다. 세자를 불러들인 영조는 분노 속에서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한여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붕당 간의 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영조는 뒤늦게 이를 후회하고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노론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장자 정조에게 물려줌으로써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켰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세자로 추존되었고 1899년 (광무3)에는 장조로 추존되었다.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임금

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임금이 신하들과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다. 왕이 중심이 되는 탕탕평평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임금이 신하들보다 한 수 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공부와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사치를 경계하였고 민생을 위해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해갔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에 대신해 바치던 납포의 양을 1필씩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었으며, 잔인한 형벌제도를 고치고, 양반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금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후 변화한 세상에 발맞추어가지 못하는 법률을 재정비하였으며,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본정책을 펴 [농가집성] 등의 책을 널리 보급하는 등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한 청계천 등에 준천 사업을 벌여 홍수 때 범람을 막아 주거환경을 개선했으며, 신문고를 달고 궁성 밖 출입을 통해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영조 본인이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학자들을 우대하고,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켜 이 시기 실학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학문 우대 정책에 힘입어 인쇄술이 개량되고 많은 책이 간행, 보급되어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영조는 개인사적으로는 콤플렉스와 지독한 불행에 시달린 인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현명하게 승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킨 임금이었다. 영조 대에 마련된 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손자 정조는 더욱 큰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의 시대를 보통 조선후기 중흥기라고도 부른다.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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