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스크랩] [1984년]`살맛나는 세상`위해 헌신한 기업가 이동찬의 경영철학 이야기

루지에나 2013. 4. 3. 13:28

 

 경영철학 
·이웃과 더불어 번영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살맛나는 세상 위한 사회봉사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은 반세기 전에 국내 최초로 일산 2.5톤의 나일론을 생산한 코오롱을 섬유, 상사, 유화, 엔지니어링 등 4조 원대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또한 14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직을 맡아 산업 평화 정착에 일조를 하였다. 1996년에 48년간의 기업경영 활동을 마감한 후 현재 코오롱 오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 사업을 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용기와 자활의 기회가 되고, 지역주민들에게도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며 2003년 5월 사회복지법인 운가자비원에 27억 원 상당의 수유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하였다. 1992년에도 12억 원 상당의 길음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한 바 있다. 이동찬 회장은 이웃과 더불어 번영하는 것을 기업인의 소명이라고 믿으며 ‘더불어 사는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기업인이다.  
그가 1947년 설립한 ‘경북기업’이라는 직물회사는 경제보국의 신념에서 시작한 회사이다. 헐벗은 국민들에게 따뜻한 옷을 만들어 입게 하는 것도 애국이라는 신념으로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그는 최근에도 산간벽지 학교에 학습 기자재 보내기 운동, 사회복지관 건립 기증 등의 사회봉사 활동을 꾸준히 펼쳐 오고 있다. 1995년에는 충북 괴산에 청소년 수련마을인 보람원을 개원해 한국 청소년 교육의 새 장을 열었다. 1954년에 코오롱상사(주)의 모태가 되는 개명상사를 설립하여 한·일 무역을 시작, 1957년 부친과 함께 한국나이롱을 창립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는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로 한국 섬유 역사에 큰 획을 긋는다.  
한때 정치에 관심을 두고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꿈도 가졌으나 해방 후 17년 만에 방문한 일본 사회의 질서와 여유가 경제적 바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목격하면서부터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1968년 코오롱상사와 한국염공, 1969년 한국포리에스텔 등을 설립하고 1970년 한국나이롱 사장에 취임하면서 원숙한 경영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1977년 그룹 회장에 오르게 된 이동찬 회장은 명실상부한 코오롱그룹의 총수로서 그룹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격동의 1980년대를 맞아 ‘변신’이라는 모토하에 기존의 섬유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함께 도모하면서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오늘날 코오롱그룹을 국내 유수의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1983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한국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썼다. 그는 격동의 노사현장을 직접 지키면서 1980년대 말 직장에서의 보람이 인생의 보람이라는 생각으로 제창한 ‘보람의 일터 운동’을 코오롱그룹의 기업문화로 정착시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21세기형 산업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정보통신사업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그룹 내에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해 집중 육성하였다. 또 다른 신성장 산업의 하나인 유통업에도 적극 진출함으로써 코오롱그룹을 21세기 신경제의 주체로서 자리잡을 수 있는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해 놓았다. 이동찬 회장이 기업인이자 공인으로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4년에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다. 
1975년 한국농구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 각종 단체에서 활약하던 그는 1980년 대한농구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통한 외교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지금은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맡아 ‘골프백서’를 발간하는 등 골프의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한국 마라톤의 열성적인 후원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수 선수에 대한 연구 장려금 지급, 인재 조기 발굴 및 육성을 위한 고교생 마라톤대회 주최 등을 추진해 마라톤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코오롱 마라톤팀을 운영해 황영조, 김완기, 이봉주 등 한국 마라톤의 대표적인 선수들을 육성, 한국 마라톤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지금도 그는 신예 지영준 등을 발굴하여 마라톤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열성을 다하고 있다. 

 

 

 이동찬 회장은 1982년 누구도 맡기 꺼려 할 정도로 어려운 자리였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바람직한 노사관계 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89년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으로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던 노사문제를 풀어가는 주역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며, 1980년대 말에는 격동의 노사현장을 직접 지키면서 직장에서의 보람이 인생의 보람이라는 생각으로 제창한 ‘보람의 일터 운동’을 코오롱그룹의 기업문화로 정착시켰다. 1990년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 1993년에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한국 노사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1994년에 산업평화 선언을 통해 노사협력의 시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동찬 회장은 인생관이자 경영철학인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를 등산을 통해서 터득했다고 한다. 정상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되고 밀려오는 환희 속에 산정에서의 호연지기를 만끽한다. 그리고 호연지기의 마음을 하얀 화폭에 그려 넣으면 무한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여태껏 등산하는 기분으로 인생을 살아왔고, 등산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그룹을 이끌어왔다는 이동찬 회장은 등산은 인생의 지혜와 슬기를 터득하게 하는 스승이라고 자랑하는 영원한 등산 예찬론자이기도 했다. 

 

 

 

 (주)코오롱은 1957년 나일론을 국내 최초로 생산함으로써 우리나라 화학섬유 시대의 새 장을 열어 현재까지 꾸준한 연구개발을 거듭하며 한국 화섬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기업이다. 지금은 원사·원단·산자·필름·전자재료·플라스틱·정밀화학 사업뿐만 아니라 멤브레인·바이오 등 미래 성장 신사업에도 적극 참여하며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기업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내 나일론 섬유업계의 호황기와 함께 화섬업계가 도약을 맞은 시기였다. 이원만 선대 회장이 창업한 지 20주년이 되던 1977년에 이동찬 사장이 코오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해 한국나이롱과 한국포리에스텔을 (주)코오롱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주)코오롱은 1983년 고려나일론을 인수한 후 1985년 섬유산업을 큰 기둥으로 삼고,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사업 다각화에 성공한다. 1990년대 들어 (주)코오롱은 합성섬유 생산기술을 바탕으로 고분자 및 정밀화학을 축으로 하는 대규모 소재 메이커로의 변신을 꾀한다. 1997년에는 1994년에 시작한 김천 CIM 무인 자동화 프로젝트가 완료됨으로써 (주)코오롱은 최첨단 신예 설비를 통해 최고 품질과 최저 원가를 실현함으로써 무인화 시대를 열었다. 1997년 4월 인도네시아 현지에 PET필름 생산공장 준공, 베트남 진출 등의 해외투자를 가시화함으로써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 국제경쟁력을 강화해나가고 내실을 기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0년에 ‘선택과 집중을 통한 기존 사업의 고도화’와 ‘사업의 세대 교체를 위한 미래사업 발굴’에 경영 역점을 두고, ‘핵심역량 강화, 투자 활성화, 미래사업 발굴, 투명경영 완결’이라는 4대 전략과제를 수립, 이를 적극 실천해나가고 있다. 

출처 : KMA 한국능률협회 블로그
글쓴이 : KMA 원글보기
메모 :